금추)세상이 끝나는 날
흐리고 습한 날씨가 나흘째 계속된 탓에 빨랫감이 쌓였다. 슬슬 해 좀 나야 이불보도 널고 혀는디...혼잣말이 데구르 바닥을 구르는 것도 익숙해진 30대의 이마요시 쇼이치는 아직도 독신이었다. 가족이나 먼저 가정을 꾸린 선후배들의 좋은 사람 있으니 소개해주겠다는 제안을 유쾌하게 거절해온 지 수년, 그의 지인들 간에는 셜록 홈즈의 여체 환생이라도 데려와야 저 눈에 차지 않겠느냐던 농이 슬슬 진지한 화제로 변하는 중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두자면, 이마요시는 연애에 무능하지도 고등학교 졸업 후 쭉 솔로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등학생 때부터 죽 연인이 있는 상태다. 현재진행형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제해온 사이로 큰 키와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운동신경을 두루 겸비한 인재로, 가끔 합리주의가 지나쳐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귀여운 구석까지 갖춘 좋은 연인이다. 지금은 바다 건너 신대륙에서 불철주야 차가운 돌이나 뜨거운 가스 덩어리를 관측하다가도 남자친구가 햄버거 피자만 먹고 살찐 거 아니냐 실없는 농담을 하면 한마디도 안 지고 물어뜯는 게 아니라 곧 복근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내줄 정도로 성격도 둥글어졌다. 이마요시가 보고 싶어하는 게 복근이 아니라 자기 얼굴이란 걸 빤히 알면서도 배나 찍어 보내는 점이 실로 흥미롭다. 저쪽에서는 반대로, '그 나이 먹고도 솔직하게 보고싶다 소리도 못하다니 애냐' 정도로 생각할 테지. 요즘 들어 15년 넘게 사귀고도 질리질 않으니 임마랑은 결혼해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이마요시지만, 여기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는 이 연인을 철저히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사 요시노리는 장신에 속하는 자신보다도 10cm가 큰, 논란의 여지 없는 사내자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이 이마요시의 솔직한 생각이지만 아버지께 누를 끼치기 싫다는 연인의 심각한 얼굴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마요시 또한 스사와 마찬가지로 무성애자 흉내를 내며 사는 중이다.
연인이라 하기 민망할 정도로 뜸하게 만나 그나마도 연인다운 일을 하는 때는 더욱 손에 꼽는 지경이니 내키기만 하면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마요시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스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15년 넘게 그들이 연인인 이유가, 연인다운 일은 거의 하지 않게 된 지금도 그 관계를 연인이라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주 단순한 문제였다. 재수 없을 땐 견우직녀보다도 오래 얼굴을 못 본다 하더라도, 자각도 없이 정조를 지키고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상대방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 애정이 너 없이 어떻게 사냐 가 아니라 나 아니면 누가 널 받아주겠냐 라고 표출되는 건 조금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한 적도 있지만 말하지 않아도 서로 무슨 꿍꿍이인지 대강은 짐작이 가는 사이인지라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거라는 게 이마요시의 결론이다. 이제 와 무언가 오해가 생기기에 그들은 서로 너무 오래 알았다.
...그렇다곤 해도 자기가 한낮이라고 새벽에 전화 거는 건 좀 그렇지. 자다 깨서는 아니고, 여태 안자고 깨어있는것까지 훤히 꿰고있는 듯해서 약간 거북살스럽다. 토로해봐야 '너는 모든 주변사람을 그렇게 거북하게 만들잖냐'라고 코웃음칠테니 불평은 않지만.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채 전화를 받아 웬일이가, 하고 말문을 떼기도 전에 저편에서 먼저 말을 던졌다.
「뉴스 봐.」
"있어봐라..."
분명한 목적이 있는 목소리에 순순히 따른다. 뭔진 몰라도 새벽 2시에 핸드폰으로 국제전화를 걸 정도로 중요한 일인 모양이었다. 포털사이트의 인터넷 뉴스란에서 그럴싸한 기사제목을 찾아내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험삼아 페이지를 갱신하자 속보가 순식간에 페이지를 빼곡히 채운다. 맨 첫번째 기사를 훑어읽으며 소행성? 확인하니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평탄한 목소리가 그래, 하고 답한다. 짧은 속보를 다시 한 번 읽어본 이마요시가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뭐라케야할지 모르겠는데...."
「진짜냐고 물어봐.」
"이기 진짜가?"
「22시간 1....4분 후에 대기권 진입해.」
"영 실감이 안 나는디..."
「본래는 마지막까지 기밀에 부치려했는데 보다시피 어떤 바보가 언론에 터트려서. 몸 조심해라.」
"니나 조심혀라, 천문학자 양반."
「천체물리학. 나야 뭐 총도있고 괜찮아.」
종말의 때를 알게된 사람들치곤 꽤 차분한 대화였다. 역시 실감이 나지않아 다시 한 번 기사제목을 확인한다. 지구 멸망ㅡ운석충돌 시나리오 현실로? 핵전쟁과 더불어 가장 일어날 확률이 높은 멸망법이란건 알고있었지만 현실이 될 거라고 누가, 아 혹시나 하고 하늘만 쳐다보는 전세계의 천문대 직원들은 길면 몇년 전부터도 알았을것이다. 천문학은 단위가 너무 크다. 이마요시가 실감할 수 있는 단위는 지질학부터 기생충학까지였다. 저 폭발은 사실 몇십년 전의 광경이고, 저 별은 수명이 짧은 편이라 300만년을 못 넘긴다는 둥 100년을 세번 반복하곤 그걸 다시 만 번이나 이은 시간에 수명이라는 생물적인 수사를 적용하는 건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그런 것들이 지금, 부딪치러 갑니다 하고 지구를 향해 오고있다는 말을 들어도 역시 위기감은 일지않았다. 차라리 근처의 큰 개가 사납게 짖어대는게 더 긴장이 된다. 스사가 전화하지 않았다면 언론까지 대거로 낚은 정교한 공갈로 치부하고 인터넷창을 꺼버렸을 것이다.
"이거...그래가 우야되노?"
「경위야 너한테는 상식일거고...」
"응, 피해가 을매나 되나."
「바퀴벌레하고 심해생물 몇 종, 플랑크톤 정도나 살아남을라나.」
"음. 인류는?"
「준비해둔 물자가 동나면 꼼짝없이 멸종일 걸. 그것도 방공호가 1차 충격에 견뎠을때 얘기지만, 전공 외라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어구야...."
그야말로 재난영화 같은 전개였다.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스트레칭하며 지금 당장 맘에 걸리는 점을 꼽아본다. 충격에 견딜만한 방공호를 준비할 충분한 시간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방공호에 피난시킬 선택받은 인재들을 뽑을 시간은 있었고 적어도 년 단위의 준비기간이 다 지난 후의 오늘, 지금일 것이다. 이마요시 개인적으로는 그 선정 기준이 심히 궁금했지만 스사가 거기까지 알 것같지는 않았다. 본인이 보호 대상이라면 또 모를 일이다만 이미 방공호에 들어간 상태라면 총이 있으니 괜찮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고, 외부와 휴대폰 통화도 무리일테고.
하루가 채 남지않은 멸망을 맞이해 혼란스럽게 기사를 뱉어내는 가상공간과는 반대로 바깥은 새벽답게 고요하다. 마지막까지 최대한 덮어두려는 측과 정보를 퍼트리려는 측의 공방이 후자의 우세로 기우는데는 1시간이면 충분할 테고, 해당분야 전문가의 발언이 공식 보도되기까지는 그보다 조금 걸릴거고, 아마 그 전부터 혈기 밖에 없는 어린것들이 미쳐 날뛸 터다. 여기까지의 추리 결과에 이마요시가 더 이상 신경쓸만한 구석은 없었다. 그는 한적한 주택가에 살고있으니 주체조차 누굴 향했는지 모를 폭동의 피해를 입을 확률도 낮다. 그보다는 스사 쪽이 걱정이었다. 오래전부터 이 일을 알고있었을 천문학자, 동양인, 체구는 큰 편이지만 그것도 일본에서의 이야기다.
"니 어데 숨기라도 하는게 안 낫나, 천문학자."
「천체물리학이라니까. 상황봐서 알아서할게 걱정마.」
"와, 니 입에서 걱정마 소리 나오니 진짜 걱정이데이."
「엉덩이 뿔난 놈 같으니라고.」
"스사, 니는 은제부터 아랐노 그거."
「2년쯤, 아마 지금 퍼트린 놈도 그쯤 됐을걸. 그 이상은 정말로 핵심요직원들... 슬슬 번역문 돌아다니려나.」
"못 막는다 결정난 건 언제고."
「음...5개월 정도.」
"근데 니 지금 와 거 있는데?"
2년 전부터 관측된 재앙을 이제와서 어쩔 힘이 이마요시에게는 없다. 어짜피 다 같이 골로 가는 판이니 억울할 것도 없었다. 스사가 즐겁게 논하는 인력과 궤도와 주파수는 그에게 와닿지 않는 문자열에 불과하다. 인류 멸종 하루 전에도 그 점은 변치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마요시 쇼이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자신과는 달리 5개월 전에 종말을 알았던 스사 요시노리가 왜 아무 대비도 하지 않았는가이다.
내일 세상이 끝난다면 이마요시는 스사와 남은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그 속을 짐작했는지 으음...하고 망설인 천체물리학자가 깊이 한숨 쉬고는 고백했다.
「실은 너랑 여행가려고 적금이랑 펀드 다 깼는데, 빠져나오지를 못했어.」
다 때려치고 내헌테 오지, 하려다 말을 삼킨다. 전세계를 상대로 기밀을 지켜온 일이니만큼 항공우주국에서도 연구원 중 일부만이 관여했을 것이다. 아무리 기밀을 유지한다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소행성의 관측 자체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고, 정면충돌 궤도를 유지하는 하늘의 거대한 암석과 거기에 대응할 천문학자들의 갑작스런 퇴직이 합쳐지면 진상을 추측해내기란 어렵지 않다.
"을매나 윽지로 잡든?"
「간 큰 아저씨 한 명 플로리다로 튀려다 반나절만에 잡혀오더라.」
"미국 첩보기관이 상대였담 으짤수 없제...."
「너한테 이쪽으로 오라고 할 수도 없었고.」
"와, 니 말 안해도 내 알아서 알믄 안되는 걸 알아부렀다고 출근한 새 잡혀가고 읎을까봐?"
「하하, 그것도 있지만. 그냥 모르고 사는게 좋지.」
"그래?"
「안 무섭냐 너? ....지구가 망한다고.」
덧붙이기 앞서 잠시 조용한 동안 말실수했다고 눈썹을 찡그렸을 얼굴이 눈에 선하다. 스사는 고등학생 때부터 이런 식으로, 방금의 말로 숨기려한 것들을 이마요시가 눈치챌 거라 뒤늦게 예상하곤 자신의 실언을 한심해했다. 30대가 된지가 몇년인데 여전히 조금도 지기 싫어하는 이 남자는, 지구가 망한다는게, 아마도.
"니 겁나나?"
「....이젠 괜찮아.」
그말인즉슨 그 전에는 겁이 났단 말이렷다?
소리내어 묻지는 않았다. 여태 반강제로 지켜오던 함구령을 남이 어겼다고 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을 정도니 쌓인 말이 얼마나 많을지 얼추 짐작이 간 때문이다. 내 커피 좀 타가오께. 들을 준비를 하겠단 소리에 스사는 또 잠깐 고민하더니 블랙으로 진하게타라, 하고 응수했다. 이마요시가 생각이라도 읽은듯이 구는건 중학교 때부터의 일이고 고등학교 때부터의 인연인 스사야 적응하다 못해 안 그러면 이상하게 느껴질테니 아마 정말로 말해버려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나누어 반이 되는게 아니라 듣는쪽도 울적하게 만들 정도로 무거운 얘기인 모양이고, 이마요시 입장에서는 어울리지도 않는 배려 마 치와뿔고 재미진 썰이나 푸지게 풀어봐라, 어짜피 내헌티는 다 따른별 얘기구마, 싶다.
최초의 발견자는 서남아시아 한 귀퉁이 작은 천문대의 젊은 연구원. 충분한 거리를 두고 순조롭게 지나갈 거란 계산 결과에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연구원들 사이에선 잠시 이슈가 됐지만 곧 하루하루의 일과에 쓸려나갔다. 월급쟁이들보다 자유시간이 많았던 한 소년이 해당 소행성의 궤도가 계산과 다름을 지적한 게 2년 전이다. 그에게 '천재'라는 수식어만 붙지않았더라도 굳이 꺼진불을 다시보는 헛수고를 할 필요는 없을거라 궁시렁대던 사람들이 창백하게 질리는데는 몇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같은 별로부터 조각났을 형제들과 비슷하게 생겨먹었겠거니 했던 재앙님께서는 어째서인지 다른 별들의 인력을 뚝심있게 뿌리치고 지구를 향해 달려올만한 밀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니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동화구연이라도 배웠나."
「맥주 먹고있어.」
"넘 마이 묵지 말고. 취해가 자뿔면 아깝잖노."
「누굴 주정뱅이로 아냐.」
퉁명스런 말이었지만 제말대로 그새 취기가 올랐는지 제법 흥이난 목소리였다. 시차를 생각하면 저쪽은 오후 네댓시, 주정뱅이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을 것 같다. 과정 자체는 그들이 중학생일 때 개봉했던 헐리우드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영화에서 다루지 않은 역사적 공밀레의 현장에 있었던 공돌이는 그 당시를 회상하자니 입이 근지러워진듯 그가 속한 팀이 관측하고 추산해야만했던 수치들과 엉성하기 짝이없던 가상모델에 세부사항이 추가되며 정교해져갔던 모양새를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도록 자세하게 구술하기 시작했다. 이런 때는 이해하려 들면 짜증나지만 흘려들으면서 저 스사 요시노리가 자기 전공분야에 흥분해서 이것저것 다 떠든다는 너그러운 시각을 유지하면 꽤 귀엽게 느껴진다. 지긋지긋해질 정도로 오래 알고지낸 덕에 체득한 경험적 지식이었다. 통화가 길어져 뜨끈하게 달아오른 휴대폰에 입만 가까이하고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가며 다시금 인터넷 기사를 확인한다. 아직까지는 새로 밝혀진 사실 없이 얼추 같은 내용을 하염없이 재생산해내는 중이었다.
아 맞나...애썼다. 공돌이는 어휘력이 딸려서 자기가 표현하는 바의 두어배는 힘들다는 21세기의 격언을 생각하며 한껏 대견하다는 목소리로 말한다. 평소같으면 머쓱하니 뭐 그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고...하는 식으로 이유모를 겸양같은것을 할텐데 대답이 어 진짜 힘들었어 너라도 보고싶을 정도로 힘들었어. 인걸 보니 힘들긴 정말로 힘들었던 모양이다. 덧붙이자면 평소에는 이마요시보다는 어머니를 찾아뵈며 정서안정을 꾀하고 싶어했다. 학생시절 이마요시가 알던 공대생들처럼 '엄마 보고싶다...'는 아니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화과자 싸들고 고향에 가고싶다'는 쬐끔 더 격식차린 형태의 한탄이었지만 그래봐야 엄마한테 어리광부리면서 쉬고싶다는 의미임에는 다를 바가 없다. 너 뒤에 ~라도 라는 보조사 하나만 없었어도 참 좋을거라 생각하는 이마요시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충전기를 꽂는다며 잠시 말이 없던 스사는 냉장고에서 꺼낸 소세지에 칼집까지 내어 전자렌지에 넣어놓고서야 이야기를 재개했다.
그래서, 로 시작해서 하는데까지 해보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겼지. 로 끝난 스사의 이야기는 아마추어 작가도 소재로 쓰지않을 흔하디흔한 전개였으나 화자의 사실만을 간단히 열거하는 무미건조한 서술방식을 감안하고 되새김질하면 퍽 장절한 구석이 있었다. 처음부터 돌아올 방도가 없는 우주선에 자원하여 몸을 실은 훈련된 우주비행사들과, 통신이 끊긴 후 몇 시간 내도록 그 누구도 한숨조차 내쉬지않은 관제센터와 실패가 확정되고도 10분이나 지나 수석연구원의 퇴근하자는 말에 겨우 얼굴을 손에 묻고 탄식하던 온갖 기술자들. 이마요시에게는 얼마만한 크기인지 제대로 짐작도 가지 않는 돌덩이가 우주에서 이리로 날아오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그에 맞선 사람들의 좌절 쪽이 몇 배는 와닿았다. 평생 볼 일도 없는 어딘가의 행성이 성분이 밝혀졌다고 자기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 신나하던 스사에게는 전자가 훨씬 실감이 났을지도 모른다. '별'이란 건 자기가 실감을 못하는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스사에게 있어 친숙한 존재일테니까. 그러니까 함께 일한 사람들 모두가 하느님도 부르지못할 정도로 절망한 그 때 그 순간부터, 아마도 정말로 무서웠을 거라고 이마요시는 생각했다. 끝나버린다는 것도, 남들은 전혀 모른다는 것도.
"인자 괘안타니 다행이다마는. 밥이나 잘 챙겨무면 또 모를까.."
「이젠 괜찮다니까.」
"거는 그른데......니 아오미네 갸 와가 첫 연습날 죙일 제대로 밥"
「넌 뭐 그런걸 다 기억하냐. ..그땐 내 인생 최대의 고난이라 생각했던거 같은데...」
"편하게 살었구만~"
이마요시 스스로도 조금이지만 놀랐다. 그런걸 다 기억하고. 물론 지금 생각해도 저 스사가, 아오미네가 첫연습조차 얼굴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아침과 마찬가지로 저녁도 몇 숟갈 뜨는둥 마는둥 하다 결국 남겼던 일은 당시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놀랍기는 했다. 빈 식판을 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는 순간 매점에서 뭘로 배를 채울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안 먹으면 고기반찬 달라 한 기억이 없는 걸 보니 그 때의 이마요시가 입맛이 없다는 그의 변명을 곧이 곧대로 듣지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신경쓰지 말라거나 기운내라거나 하다못해 어깨를 한 번 두드린다거나 하는 격려를 한 기억 또한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스사의 성격이었고, 두번째 이마요시 자신의 상황이었다. 자존심 강한 그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고 기분 상하지 않으면서 힘이 될만한 적절하고 유의미한 언행을 궁리할 여유가 기적의 세대를 갓 영입한 고3 주장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스사가 3학년 스타팅멤버로서 이마요시를 거들듯 부의 분위기에 관여하게 된 것도 4월이 다 지나간 후였으니 서로가 서로를 방치해뒀던 셈이다. 머리도 다 굵어 연인 한명의 고민쯤이야 너끈히 달래줄 수 있게된 지금 하필 지구가 멸망한다니 아까운 노릇이었다.
"인자 그런 일 생김 잘 달래줄낀데..."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리자 아직 술기운에 잠긴 스사가 작게 웃는다. 어련하시겠어, 하는 목소리가 다시 담담했다. 5개월 내도록 겁나지야 않았을게다.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니까. 쉬 짐작하면서도, 정 힘들 때에는 무슨일인지 말 안해도 좋으니 조금쯤 의지해도 괜찮은데, 하고 어딘가 아쉬웠다. 어릴 적엔 서로 손벌리지 않고 알아서 잘한다는게 자랑이었던 주제에 이제와서는 그 반대라니 묘한 느낌이었다.
"니 전화 안왔나?"
「자동응답기 있으니까....」
"아니 안 받아도"
「내가 왜 메일도 메신저도 아니고 이 비싼 국제 전화를 걸었겠냐?」
"요금 안 내도 되니까 이참에 맴껏 써보자!"
「정답입니다.」
"상품은?"
「그런 거 없다.」
이제와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같이 낯간지런 말을 하기엔 이런 농짓거리를 주고받으며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무엇보다 이마요시는 말은 커녕 눈길 한 번을 읽어 그 속을 아는 사람이고, 스사는 스사대로 이마요시가 그렇다는 걸 정확히 알고있다. 의사가 정확히 전달된다면 첨언은 불필요하다는 합의마저 무언으로 이루어진 사이였다. 폰 윽수로 뜨급다, 하니 내일 세상이 망하는데 그 정도는 참아, 가 답이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앞으로 22시간도 남지 않았다. 자기장이라거나 전자기파 같은게 관련되어 통신기기가 먹통이 된다면 더 조금일 것이다. 거기 대해서는 뭔가 예측한게 없나 검색하며 이마요시가 새벽 한중간에 그닥 어울리지 않는 일상적인 질문을 하고, 스사가 거의 궁리하지 않고 술술 말하고, 정정하고, 다시 말을 잇는다. 차분한 목소리가 맘을 가라앉혔다. 이렇게 종말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22시간 내내 여태 부족했던 말들을 전부 꺼내놓을 수 있을지까지는 자신이 없었다. 이마요시는 잘 말하는 사람이지만 내일 세상이 망하는데 그런 가볍고 무의미한 말들을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 진심을, 고르고 고른 정수를 주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그와 반대로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뭐라도 말해야겠다는 듯이 조잘조잘 자기 차와 정원과 수도관과 옆집 고양이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 수다를 떨었다. 조금도 시간을 허투로 보낼 수 없다는 듯한 대화가 잠깐 끊겼을 때 서랍장을 뒤적거리는 소리 후 전송된 반지 사진[TA-DA] 에는 아무러한 이마요시도 제법 울컥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니 집이가?"
「어.」
"아까 전화온 건 누고?"
「팀 동료, 다 같이 뷔페라도 가자고.」
"우째 다덜 해탈혔구만. 그보다 스사, 내 손에 짐 니 집 주소가 들려있는데."
「아, 그거 번역」
"치아라, 원문 보고있다. 니 진짜 대가리 뽑혀봐야 정신차리지, 총 있어가 괘안키는 개뿔이 동네사람 다 도망가뿔고 읎어가 안전하것구만!"
5개월 전부터 두려워하다 해탈하거나 적응하거나 하여간에 공포심이 마비된 인간은 제외하고, 소행성 충돌지점에서 5마일도 못 떨어진 도시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도망칠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줄곧 통화중인 핸드폰을 포기하고 집으로 전화한 스사의 직장 동료도 같이 최후의 만찬을 즐기자는게 아니라 너 지금 어디냐고 빨리 가자고 전화했을지 모르는 일이고, 하지만 이마요시는 지금 냉정할 수가 없었다.
"미친놈아 아무리 다 뒈진다케도 그건 아이지, 왜 아주 어서옵쇼 지구별에 이래 플랭카드라도 붙이고 팔 벌려 환영하지 그라노 어? 다시 생각혀라 니 진짜 그건 아이다 뭐 그래 한방에 빠르고 손쉽게 골로가는 좋은 방법이긴 하다만은.."
「그렇지?」
"좆까라 씨발아!"
「야 몇년만의 육안관측인데 형 말리지마라.」
"이새끼가 이제 아주 그냥 주디로 똥을 싸네"
「죽으려고 있는거 아니라니까. 지금 내가 세상에서 두번째로 보고싶은거란 말이야.」
싹 숙이고 들어와 달래려는 품을 보니 미친짓이란 자각은 있는것같다. 방금 말로 제딴엔 짠하게 말문을 막아보려는 수작이었나본데 터무니없는 역효과였다. 이마요시는 세상이 망하기 전 제일 보고싶은거 하나 못 보여주는 무능한 연인으로 죽기는 정말로 싫었기때문이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싶어서 그러는거라고, 봐줘라.」
"스사."
「왜 이마요시.」
"보고싶다."
「..너...! 이 비겁한, 멍청아, 말하면 더 보고싶어지잖아」
"그딴 건 내 알바 아이고 내도 니 보고싶다. 그 개 미싯구녕같은 AQ머시기카는 돌삐랑 내 중에 하나 골라라."
그 말이 하고 싶어 이 새벽에 전화를 했을 것이다. 이마요시, 보고싶어. 끝까지 말 못한 까닭은 볼 수도 없는데 더 보고싶어져 못 견딜까봐. 그야 기껏 일본까지 날아와 공항을 나오지도 못하고 끝나면 무슨소용인가도 싶겠지. 그러나 이마요시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22시간을, 죽 대화하기 보다는.
"니 집이면 이판에 감시도 읎을끼고 안즉 공식발표두 읎으니 뱅기 충분히 타고도 남는다. 직원증이라도 들이대가 내 보러온나. 내도 가께."
「억지 부」
"윽지 아이다, 대강 중간서 보면 니 아구창 날릴 시간은 충분하깄네. 니 지금 젤로 보고 싶은거 보러온나. 아 반지 가져오레이, 끼고 패주꾸마."
「그런 소리 듣고 가겠냐!」
"그라믄 반지나 도. 내 줄라꼬 산거 뒈지기 전에 거나 주고 그 담은 니 좆대로 혀라. 안 글면 내 뒈져서도 성불 안혀고"
영원히
"우주가 한 점으로 쫄아들 때까저 원망할끼다."
「...영원히는 너무하지 않냐.」
아, 알아들었구나.
넣어야지 했던걸 깜빡해서... 도쿄-워싱턴라인이면 빼박타임오버지만 아테네나..글케 유럽에서 만나면 최소 16시간으로 가능한거 같았다 스사 출국금지는 당일부터 풀린느낌 정부입장은 혼란을 최소화하기위해 언론통제...삼십대중반으로 잡아서 스사 아마 영주권 있...을지도 비자없이 입국가능한곳으로 알아서 잘 골랐겠지 기밀유출한 사람은 몇날동안 열심히 작성한 문서를 계속 망설이다 하루남겨두고 결심한게아니라 이성을 잃고 케이블방송이며 웹에 올렸음 그래서 장본인 피드백은 없고 사정모르던 업계인들이 ㅎㄷㄷ진짜잖아 용어쓰는거 보니까 전문가야 해서 카더라로 쫙쫙퍼지고 미쿡에서는 제일 막나가는 방송 딱 한군데빼고는 미보도 일본은 시간대가 새벽이라 넷상에서만 급속도로 부풀고 온갖음모론이 확대생산되는 중이라 금길이가 비행기타는데는 문제없음 스사쪽이 술렁술렁..이지만 이쪽은 본토라 통제가 빡쎄서 잘 모르는사람들은 뭐야뭐야 하고 관심갖고 관련된 학생이나..그런쪽은 뭐야 진짠가 하고 확인해보고 뻨 진짜쟝 혼파망 이쪽도 서둘러서 외투랑 지갑만 챙기고 택시로가면 교통마비되기전에 공항엔 갈수있다 물론 운이좋아야 뱅기타겠지만 그부분은 헐리웃보정으로 어떻게든....글고 한창 뱅기타서 날아가는중에 정부부처에서 존나 헛소문입니다 가 아니고 노코멘트라고 인터뷰해서 본격적으로 혼돈파괴망가 예아
비행기에서 티비 볼수있나? 이륙한후에는 전화해도 되던가? 격리된 공간이라 뱅기에서 내리니 갑자기 세기말st인것도 좋고 비행기안에서도 외부소식접해서 동요하는데 기장이 침착해달라고 기내방송해도 좋고
스사는 포스트아포칼립스마냥 버려진 도시 텅빈백화점에서 선글라스 들고나와서 남의빌딩 옥상에서 맥주빨면서 소행성충돌의 현장을 보려고했음 이새끼한테 이사건은 존나 내인생과 같은 시대에 발생하는 육안으로 관측가능한 우주쇼지 지구멸망은 아님 인류멸망이긴해도 지구찡은 계속 살아간다 뭐 이런..
또 뭐였지 넷상에서의 정보전달이랑 공신력을 가지게되는 과정같은것도 꽤 골때렸던거 같은데 금추는 비행기를 탈테니 언제 뒤집혀도 이젠 상관이 없는걸로...<< 참 퇴근합시다 한 사람은 스사네랑은 다른 팀의 chief 걍 스사가 치프라고 누굴 부르는게 보고싶어서.. 여까지 배경설정
사람 득실대는 공항에서 남의 눈은 보이지도 않는다는듯이 서로 자석처럼 직선경로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스사가 먼저 팔뚝잡고 끌어당겨 품에 우겨넣음 어디로가야할지도 모르면서 도망가고 또 도망오는 사람들 속 세상에서 제일 보고싶은걸 눈에 온전히 담기도 전에 몸이 반응한거 잠시 그대로 내버려두고 이마요시는 가방도 없이 홀몸인 스사의 겉옷주머니에 차례로 손을 넣어봄 반지내놔새끼야 아오 이걸진짴ㅋㅋ하는것처럼 팔을 꽉 조였다 놓은 스사가 안주머니에서 꺼내주라 지말대로 반지끼고 아구창날려주는금길이 장식없는 걍 가락지라 더 부담없이 갈겼겠지 포옹죽빵키스라는 존나축약된 호모치정극에 주변사람들이 좀놀라겠지만 몇시간 뒤에 망하는데 그딴게 뭐가 중요하겠어 나란히 시내를 향해걸으면서 이번엔 전화상이 아닌 육성으로 두서없이 얘기나 주고받아라 주로 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렇게나 너를 좋아한다 새끼야 하는 내용을 존나 다섯번쯤 꼰 얘기..어디의 백색왜성이름을 아나그램하면 쇼이치가 된단소릴 들었을땐 시발 내남친이 소수를 읽으면서 발ㄱ하는류의 변태란말인가 싶었으면 좋겠다 손은잡지않는다 얼굴 본것만으로도 만족해버린느낌. 근데 맞은데가 아픈지 혀로 입안을 더듬고있으면 따땃한 뺨에 뽀뽀를 해주는 존나 하나만해라싶은 호게모이 사람들은 남은사람들은 대개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들한테로 숨어서 인적이 드문길을 계속걷다가 광장과 분수가 나타나서 동전던지고 버드키스하고 분수대에 나란히 앉아서 또 잡담하다가 물에 손넣어본 금이 신발양말 훌훌벗더니 엉덩이만 대고 180도돌아 발담금 금은 신발에 양말 한짝씩 구겨놓고 추는 양말개서 한쪽에 얹어놈 책에서 봤는디, 하고 인용하는건 코스모스 오전의 하늘에 밝게빛나는걸 보면서 얘기하고 그런 옆얼굴을 한번 하늘을 한번 손목시계를 한번 시차때문에 맞질 않으니 시계탑을 목을 빼서 찾다가 자기가 아는 충돌시간은 어짜피 자기시계에 맞는다는걸 깨닫고 자기 어깨에 기댄 이마요시 머리에 뺨을 기대고
스사는 너무 문어체라고 그책을 썩 좋아하진않지만 이마요시가 자기 때문에 그책을 샀다는 것정도는 짐작하고있었음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순수하게 그 노학자의 이야기를 즐겼다고해도 뭐 아무튼 동기가 자신이었다는건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세상의 끝을 고작 몇시간 남겨둔 시점에서 인용하는 문구가 스사의 인상에도 깊게 남아있는 한소절이란게 참 뭐라해야하나...얘나 나나 그럴법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 같이있는 거구나 싶음
We are made of starstuff.
― Carl Sagan, Cosmos
당신과 나는 같은 별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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