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가 계산할게요!
팔을 잡는 손과 함께 들려온 말에 키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중학생 때부터 모델로 일해 자기수입이 있던 그는 친구들에게 한턱 쏘는 일에 익숙했고 나이까지 포함해 어엿한 사회인이 된 지금에 와서는 당연한 행동 양식으로 몸에 익어버린 상태다. 잘 나가는 모델 키세료타가 쫀쫀하게시리 10엔까지 따져가며 더치페이하기는 모양새가 조금 그렇지 않은가. 물론 지금처럼 상대방이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서둘러 나설 때에는 사양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그렇게 대응하게 된지는 그리 오래되지 못했다. 기쁘게 웃으며 정말요? 그럼 다음엔 제가 더 맛있는 거 쏠게요! 하고 받아들이는 편이 그럴 필요없다고 고집부리는 것보다 훨씬 상황을 원만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요컨데 자기 마음의 평온과 상대방의 자존심 중 전자를 중시했던 셈이고, 원만한 사회생활을 보다 중요시하게 된 지금은 반대로 후자를 존중하는 편이다. 머리가 덜 자랐던 고등학생 때와 지금이 같아서야 나이 헛먹었다는 소리 밖에 안된다. 그래도 늘 예전을 생각하면 입맛이 썼다. 지난 일은 어쩔 수 없고, 만에 하나 딱 한 번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때로 시계 바늘을 돌릴테지만 그래도 늘.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을 그 때에도 할 수 있었다면 그 선배도 조금은 다르게 웃었을 것이다. 미련이라 이르기엔 너무 묽은 후회이고, 그래도 키세는 늘 그를 생각했다.
다음에 또 보자는 식상한 작별인사로 스탭과 헤어진 키세는 가볍게 한숨쉬고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리 모델의 기본소양이 바른 자세라지만 날숨이 코 밑에 얼어붙는 이런 날씨에 가슴을 쭉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간 집에 1/3도 채 못가서 콧물이 수돗물마냥 흐를 것이 틀림없다. 좀 더 두꺼운 코트를 입고 나올 걸 그랬다고 혼자 투덜거리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발 밑에 사박사박 언눈이 밟힌다. 집에 뭐 따뜻한게 있던가? 혹시 모르니까 우동이라도 사먹을까 생각하며 시간표를 확인한 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앉을 자리를 기대하고 돌아섰다. 장갑을 한쪽 주머니에 쑤셔넣은 코보리가 목도리를 어떻게 맬까 고민하고 있었다.
키세보다 2살이 많은 이 농구부 선배는 끝자락을 위로 빼내면 잘 풀리고 그렇다고 아래로 가게 묶으면 배긴다고 겨울이면 늘 목도리와 씨름하곤 했다. 웃으며 풀리지 않도록 야무지게 그의 목도리를 묶어주는 건 키세의 몫이었고. 벌써 몇년 전 이야기였다. 그때였다면 키세는 살금살금 그의 뒤로 돌아가 검지로 허리를 꼭 찌르며 제가 묶어드려요? 하고 장난스레 말을 걸어 놀래켰을 것이다. 키스가 어색한 사이가 되어버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더는 연인 사이가 아니었고, 키세도 이제는 고교생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옛날과 똑같이 목도리를 걸치고 고민 중인 코보리가 눈 앞에 있다. 잠깐이지만 시간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머리모양도 그대로인데 여기저기서 어른태가 나는 것을 지나가는 눈길로 확인하며 키세는 차분하게 그리고 반가워하면서 말을 건넸다.
"코보리 선배 오랜만임다, 이런데서 다 만나네요!"
"어, 키세? 오랜만이다. 집에 가?"
"네. 선배는요?"
"나도."
요즘 날씨가 많이 춥네. 살갑게 말하는 그의 뺨이 발갛게 얼어있다. 버스를 기다리느라 저렇게 된거라면 이제 곧 그 버스가 올 것이다. 길게 얘기할 수는 없을듯해 키세는 우선 제 목도리를 가리켰다. 이거 매기도 편하고 좋아요. 가만 살펴보고는 이렇게? 하고 곧잘 따라해낸다. 꽁꽁 목이며 아랫턱을 감춘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그만큼 코보리와는 깊이 상처입는 일 없이 좋게 헤어졌다. 마는, 그건 어디까지나 키세의 관점이지 코보리 본인이 어땠을지는 모를 일이다. 견디지 못할 구석이 있으니 헤어지자 말을 꺼냈겠지, 짐작만 했다. 겉옷 주머니에 대충 찔러두었던 장갑을 손에 다시 끼며 코보리는 후배가 꽤 반가운 눈치였다.
"어떻게, 잘 지내?"
"네, 뭐...그냥 잘 지내요. 선배는요?"
"나도 뭐. 그냥저냥. 아, 집 옮겼어 직장 근처로."
"아 카사마츠선배한테 들었슴다! 그, 서향이라고."
"응. 주말에 늦게까지 자기 딱 좋아."
흠 잡을 데 없는, 아무하고나 할 수 있는 잡담을 주고받으며 키세는 흘금흘금 전광판을 살폈다. 코보리가 아무리 자길 반가워해도 버스가 오면 보내야한다. 뭔가 좀 더 의미있는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이 하고싶은지조차 몰랐다. 버스 정류장에서라니 너무 갑작스럽잖냐고 징얼거리고 싶을 정도다. 아랫집 총각이 수도관 동파 대문에 욕실을 빌려쓴다는 얘길하며 시계를 본 코보리가 문득 화제를 바꿨다.
"키세, 많이 바빠?"
"아뇨 아무것도.."
"그래? 그럼 어디 들어가서 얘기라도 좀 할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헤어지기도 아쉽고.."
"네?"
이 사람이 먼저 남을 붙들기도 하던가? 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그건 언제나 키세가 하는 일이었고, 코보리는 늘 붙들려주곤했다. 불만은 없었다. 지금도 없다. 다만 키세 쪽에서 이제는 뭐라 말하며 붙잡아야할지를 몰랐으니까 그가 기다리는 버스가 오면 보내야 할 줄로만 알았다. 별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느라 대답을 않자 코보리는 조금 멋적게 웃고는 부드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키세군, 저랑 차나 한 잔 하실래요?
"....선배, 아직도 그검까..."
"설마. 너한테만이야."
"선배가 사는거죠?"
"그래도 돼? 너 맨날"
"저도 바뀌었슴다 많이."
발치를 내려다본 모델이 열없이 덧붙였다. 이제 안 그래요, 코보리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