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End -2-
둘 다 연습이 있고 적어도 타카오는 연습을 단 한 번도 빼먹을 생각이 없기에 자연히 아오미네와 만나는 요일이 정해졌다. 어느 순간 시간과 장소, 용건을 미리 정하지 않게 되었다. 타카오는 그동안 자기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에 대해 열심히 수다를 떨었고, 아오미네는 들으며 웃기도 하고 어이없어도 하다 조금씩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딱히 뭔가 특별하거나 흥미진진한 과거사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과거를 공유하지 않는 사이에서 추억담이 나올 일이야 드물기는 하지만, 타카오가 가끔씩 던지는 중학교 때는? 이란 질문에 아오미네는 언제나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그의 중학교 시절까지도 궁금해졌으니 미도리마에게 자세하고 장황한 얘기를 부탁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다이쨩 말대로, 본인을 두고 그걸 왜 남한테 들어. 그래서 타카오는 끈질기게 중학교 때는? 을 반복했다. 대답은 뒤늦게, 갑작스레 돌아왔다.
“카즈 너, 중학교 때 얘기 좀 해봐라.”
무언의 합의 하에 만남의 장소로 결정된 예의 마지버거, 묻지도 않고 데리야키버거 라지세트까지 주문해 들고 온 타카오에게 툭 던져진 말이다. 도무지 맥락을 읽어낼 수가 없어 당황한 표정에 아오미네가 또 조금 웃었다.
“응?”
“아무거나.”
“갑자기 그런 요구를 하니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할지…별거 없었어? 먹고 자고 놀고 연습하고.”
“나도.”
“응?”
“먹고 자고 수업 땡땡이치고, 연습하고. 아 난 안 졌지만.”
“다이쨩 방금 졸라 재수 없었어 주먹이 막 운다.”
“하하핫.”
“…하하, 뭐야.”
“나도 그랬어, 카즈.”
별다른 거 없었어. 타카오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모를 뿐이지. 저 아오미네 다이키와 기적의 세대의 중학시절이 자신의 것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의도는 제법 똑똑히 전해졌다. 별거 없이 무의미하고 그렇지만 즐거운 나날이었다고. 턱을 괸 저 천재양반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범인인 저로서는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다만 한 가지. '나도' 가 이렇게나 가슴 떨리는 말인 줄을 처음으로 알았다. 누군가와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이제와 낯설 것 없는 감각이 이상하게도 설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하이 지역 예선이 시작됐다. 그때쯤, 해서, 때때로 스치는 정도가 전부였던 손이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닿아왔다. 아오미네가 그런 식으로 손을 잡아올 때 타카오는 반드시 마주 잡는다. 주로 길을 걷다 자연스레 몸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붙드는 타이밍이 언제나 기가 막히는데, 그나마도 보는 눈이 있을 때엔 절대 하지 않았다. 그 타이밍을 재는데 아오미네 본인은 별로 힘들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타카오더러 그렇게 하라면 걷는 내내 머릿속에 손잡을 생각밖에 없게 될 것이다. 길이 다시 넓어져 바짝 붙을 필요가 없게 되면 주저 없이 놓아버리기 때문에 타카오도 그리 힘을 주어 잡지는 않는다. 늘상 농구공을 만지는 탓에 피부가 두껍고 체온이 조금 높은 손이었다. 우와, 손잡았다 두근두근! 하는 식으로 각별히 의식하는 일이 없이, 그냥 닿은 부분으로 스며들어 닿지 않은 손끝까지 퍼지는 온기가 좋아서 타카오는 먼저 잡아오는 아오미네의 손을 살짝 감싸 쥐곤 했다.
한 체육관의 늘어선 코트에서 동시에 여러 시합을 동시에 시행하는 예선 동안 슈토쿠는 토오와도 세이린과도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도쿄 삼왕자 중 두 팀이 같은 블럭에 있던 작년과는 달리 배정에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센신칸은 더 이상 슈토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 때 도쿄 지구의 결선리그 멤버에 센신칸, 세이호, 그리고 슈토쿠가 빠지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그 한 때라는 게 고작 2년 전이란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기적의 세대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막연하게나마 실감이 난다. 슈토쿠는 기적의 세대를 획득한 순간부터 향후 3년간의 경기에서 그러지 못한 나머지 두 곳에 비해 더 나은 성적을 보장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적의 세대를 획득한 학교는 한 곳이 아니며 그 학교들을 꺾고 전국 대회에 우승한 신설고가 어디 멀리도 아니고 바로 같은 지구에 있다. 가장 높은 곳을 노리는 팀의 선수로서, 미도리마 신타로의 파트너로서, 슈토쿠의 포인트가드로서 타카오는 결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결선리그는 그야말로 격전이었다. 카가미는 여전히 미도리마와 상성이 나빴고, 슈토쿠와 세이린 양자 모두 뛰어난 센터가 사라진 빈자리를 완벽하게는 채우지 못했다. 토오 상대로는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거라고 사망판정을 받았던 미스디렉션이 윈터컵 결승전의 여파로 다시 부활한 것이 판명되었지만 호크아이가 있는 슈토쿠는 새로운 대책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토오와의 시합, 타카오는 처음으로 코트 위에서 아오미네 다이키와 만났다. 빠르고 정확하고 제멋대로. 꼭 몸 속에 피 대신 환희가 흐르는 사람 같았다. 유니폼을 입은 채로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가, 인터하이 출전학교가 정해진 뒤 여느 때처럼 만남을 가진 마지버거에서 타카오는 신중한 태도로 감상을 들려주었다.
“…괴물?”
“뭘 새삼?”
이 나이대의 남자들이 숨 쉬듯 부리기 마련인 허세가 아니라 본인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 얄밉다. 타카오가 요걸 어떻게 곯려야 잘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며 빨대를 깨무는 동안 토오의 에이스도 별 말이 없었다. 상대팀에게 한 없이 막막한 장애로서 존재하는 것에 그는 이미 익숙했다.
“괴물 같은 건 니네도 하나 있잖아.”
“신쨩? 아니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남에꺼는 역시 느낌이 다르다고나 할까 뭐랄까….”
그리고 아오미네는 충분히 그럴 만 했다. 무관의 오장 더블팀을 제치고 나오는 우리팀 에이스가 든든했듯이, 우리팀에서 가장 디펜스 잘하는 사람 둘의 마크가 붙었는데도 허허벌판을 달리듯 슥 피해 지나오는 남의 에이스는 위협적인 수준을 넘어 끔찍할 지경이었다. 제 아무리 고교 최속이라 해도 던져진 공보다 발로 뛰는 사람이 더 빠를 수는 없을 텐데, 분명 잡아뒀다 생각한 게 어느새 쫓아와있으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타카오가 농담으로라도 못 해먹겠다 소리를 하지 못한 건 캡틴이 한 발 먼저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심정적으로는 매우 동의하지만 심판 귀에라도 들어갔다간 재고의 여지없이 테크니컬 파울을 받을 수위의 발언이었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져서 OB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캡틴은 틀림없이 형에게 살해당할 테니까 모두, 미도리마까지를 포함해 정말로 모두가 달려들어 그를 진정시키는 동안 열 오른 머리며 위축된 어깨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고교 최속의 속도를 추정하고 그 손이 닿지 않을 곳으로 공을 옮기느라 과열된 머리로 팀 분위기까지 관리하려니 슬슬 힘에 부치던 PG로서는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 슈토쿠 졸업생이 존속살해를 저지르게 만들 뻔 했던 원흉은 지금, 타카오의 맞은편에 앉아 감자튀김에 알뜰살뜰 케찹을 묻히는 중이다. 방금 받은 지적따나 우리팀에도 에이스로서는 끝내주게 믿음직하지만 그 외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아무리 봐도 이상한 놈이 하나 있기는 한데, 미도리마에게 익숙해졌다고 해서 아오미네에게도 익숙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포장지에 묻어나 굳은 치즈를 슬쩍 떼어 빵 사이에 넣으며 타카오는 갑자기 햄버거에 물렸다. 매번은 아니어도, 약속 장소가 마지버거이다보니 아오미네와 만나서 하는 식사는 햄버거 세트일 때가 많았다. 뭐 먹으러 가자고 제안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늘 햄버거였다. 데리야끼 버거 라지세트. 아오미네가 늘 먹는 메뉴다. 그가 질리지도 않고 딱 한 가지만 먹는 동안 타카오는 마지버거에서 판매하는 모든 종류의 버거와 음료와 사이드 메뉴와 디저트를 섭렵했다. 개중 마음에 쏙 드는 것도, 도저히 입에 맞지않아 마주 앉은 상대에게 도움을 청한 때도 있지만 어찌됐건 타카오는 이제 더는 마지버거에 볼 일이 없다!
“있잖아, 우리 맨날 햄버거만 먹는데.”
“음.”
“난 이제 질렸거든.”
“그래?”
“응. 이제 딴 거 먹고 싶다.”
“어떤 거.”
“그건 아직 모르지만, 아무튼 햄버거 말고 딴 거. 근데 다음 토요일 뭐해?”
“뭐? 글쎄.”
“주말에 가족 여행 나만 빼고 가거든, 오전 연습 있어서. 놀러 올래?”
햄버거 말고 다른 거 먹자는 얘기가 갑자기 왜 집에 놀러오라는 제안으로 연결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아오미네가 끄덕였다. 명백하게 일단 끄덕이고 보자는 태도가 어쩌다 나랑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라는 약간 묵은 의문을 일깨웠지만 타카오는 그 물음표를 머리도 내밀지 못하게 꾹 눌러 본래 있던 곳에 다시 구겨넣었다.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몇 시에 끝나는데.”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이 훨씬 중요했다. 핸드폰을 꺼낸 손은 달력을 띄우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한 시 쯤에?”
“…된다.”
“그럼 밖에서 만나서 점심 먹고 가자!”
“그래.”
“맛있는 거 뭐 먹을까~”
“많이 안 기다리는 데로.”
“응 알았어. 아 다이쨩은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그러자 아오미네는 신중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기 하나도 없는 건 빼고.”
“아 그치, 달걀이라도 있어야 밥 먹을 맛 나지!”
밖에서 만나 덮밥을 한 그릇 씩 시켜 먹은 뒤, 시원하게 냉방이 되는 버스를 타고 아오미네를 집으로 데려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물었는데도 말할 생각이 들지않는 더운 날씨였다. 어느새 티셔츠의 짧은 소매를 둘둘 말아 어깨를 다 내놓은 아오미네의 이마에도 굵은 땀이 맺혔다. 덥다는 한탄은 너무 당연한 소리라 오히려 짜증이 날 것 같다. 고된 연습으로 흘리는 땀에는 댈 수도 없게 불쾌한 체액이 상의를 적셨다. 같은 땀인데, 왜 이렇게 짜증 나냐. 서로 말이 없는 게 차라리 나았다. 잰걸음으로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마자 에어컨 리모콘으로 쇄도한다. 에어컨은 쳐다보지도 않고 리모콘을 조작하면서 동시에 선풍기를 트는 간단한 과제를 완수하고 돌아선 타카오는 티셔츠를 걷어 드러난 아오미네의 배와 마주하게 되었다.
“와 씨 진짜 덥네 오늘.”
“길에서 좀 부딪쳤다고 살인 날 거 같다.”
집주인이 비켜준 공간을 냉큼 차지한 손님이 살갗에 직접 바람을 쐬며 이제 좀 살겠다고 신음을 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 사이에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온다. 수건으로 닦는 대신 손으로 훔치고는 묻어난 물기를 팔에 적당히 문지르는 타카오를 아오미네가 힐끔 보았다. 딱 한 번 딱 한 순간인데 그걸 또 놓치지 못하고 눈이 마주친다. 물론 분위기가 어색해지도록 그냥 둘 타카오가 아니었다.
“다이쨩도 세수하지? 바람 쐬면 완전 시원해!”
“어.”
당장의 열기를 식힌 아오미네는 순순히 그 제안에 따랐다. 세수하는 김에 티셔츠도 물에 적셔서 만족했는지 화장실에서 나올 때는 들어갈 때보다 훨씬 풀린 얼굴이었다. 에어컨 바람을 등에 쐬면서 앞으로는 선풍기를 마주보고 맞바람을 쐰다는 호사를 엄마 몰래 누리는 한창 중이던 타카오가 손짓한다.
“거기 물 놨어, 시원하니까 마시고 숨 좀 돌리자.”
“너 그거 뭐야?”
“머리띠, 말해두지만 동생 거. 사실 내 거 하나 살까 고민 중.”
“흠.”
물 한 컵을 마시는 내내 타카오의 이마에서 눈을 떼지 않던 그는 입을 열어 고작 시원하겠네, 별 거 아닌 한 마디를 뱉고는 선풍기의 회전 버튼을 눌렀다. 싱겁기는, 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타카오가 여지껏 파악한 아오미네는 보기보다 장난기가 있을지는 몰라도 보기보다 싱거운 사람은 아니었다. 별 것 아닌 게 아니라 별 것 아닌 척 한 것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타카오는 입이 근질근질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했어? 직접 물어도 자기자신의 사유에 의미를 두는 때가 거의 없는 저 동갑내기는 그냥 있었다고 답할 게 틀림 없다. 본인이 모르니 정 알고 싶다면 이쪽에서 파악해내야 하는데, 타카오가 느끼기에 그는 아직도 아오미네 다이키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즐겨가는 스포츠샵을 알고, 좋아하는 그라비아 아이돌을 알고, 어느 초등학교를 나왔는지 알고, 의외로 사교적인 구석이 있는 것도 알지만, 그런 아오미네가 근본적으로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모르는 채라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타카오는 그걸 알고 싶었다. 그러면 왜 머리띠 한 남학생을 빤히 봐놓고는 아무 말이 없는지, 왜 다른 애들 다 제쳐두고 호리키타 마이쨩인지…왜 타카오 카즈나리를 좋아하게 됐는지 아, 이런 애라서구나, 하고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러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서로 몸이 닿지 않게 나란히 앉은 선풍기 앞에서, 근면하게 돌아가는 플라스틱 날개에 대고 아————— 길게 소리를 넣는다. 기대대로 변조되는 목소리를 듣고 우주인 놀이. 하고 과장되게 만족스런 표정을 짓자 아오미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한 번 터진 웃음이 뜻대로 멈춰지지 않는지 고개 숙여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에게서 끅끅 소리가 났다. 별 것 아닌 장난에 이렇게나 큰 호응을 해주니 타카오로서도 아쉽게 이걸로 끝낼 수는 없었다.
“나—는—화—성—인—이—다—”
“……큽!”
가벼운 흉내와 힘세고 오래가는 웃음, 이거야말로 효율적인 개그다. 달성감으로 차오른 타카오를 아오미네가 쥐어박았다.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솜방망이도 이런 성긴 솜방망이가 없어서 타카오도 그만 웃음보가 터졌다.
별 것도 아닌 일로 기운이 빠질 때까지 웃고 나니까 몸도 적당히 식었다. 뭐하고 놀까, 당장 다섯 가지 정도 떠오른 경우의 수를 미적지근한 열의로 비교하는 타카오의 다리를 남의 발이 툭 건드렸다. 남의 집 거실 바닥에 한 번 퍼질러 앉더니 그 자세를 바꿀 맘이 안 드는 모양이었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한껏 상체를 늘어트린 채인 아오미네가 네 방은 어디야? 하고 물었다. 정석적인 대답으로 직접 볼 수 있게 안내하려고 하면 단박에 귀찮다고 거절할 것만 같은 태도로 그런 걸 묻는다니 참신했다. 얇은 여름티를 펄럭거려 안에 바람을 넣으면서 방문 하나를 손가락질 한다.
“저기.”
“구경해도 돼?”
“응? 얼마든지!”
물어보는 중에 이미 몸이 일어나고 있었다. 움직일 생각이 아예 없던 게 아니라 가능한 늦게까지 미루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먼저 문 앞에 도착한 아오미네는 방주인이 쫓아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려 문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아는 애 방이 아니라, 뒤에 뭐가 있을 지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문의 너머로 새로운 세상을 볼 것을 기대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이라도 잠깐 타임! 을 외친 다음 그를 위한 서프라이즈를 준비해놓고 재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의무감에 시달리는 타카오를 모른 채 아오미네는 첫 감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깨끗하네.”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두리번두리번 방 안으로 들어가는 아오미네는 높은 확률로 바닥의 과자 봉지를 발견하지 못 했을 것이다.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발로 조심히 밀어 책상 밑에 숨겨버리고, 냉방된 거실의 공기가 들어올 수 있게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어중간하게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에 시선을 던진 아오미네의 입술이 슬쩍 웃었다.
“앉아도 돼?”
“그럼!”
이불을 슬쩍 밀어만든 매트리스 위 빈 공간에 가만 엉덩이를 붙이는 PF는 아무래도 타카오와는 달리 자신이 점잖고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하는 손님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친구랑 놀자고 집에다 불러온 타카오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편하게 있으라고 어울리지도 않는 소리를 하기도 좀 어색하고…. 사람을 이렇게 신경 쓰이게 만든 원인은 두 다리 뻗고 앉아서 눈을 데굴데굴 굴려가며 방구경을 하고있다. 중학생 때 붙여놓은 NBA 포스터부터 시작해서 동생이 계륵 처리 삼아 책상 서랍에 한 개씩 붙여나간 띠부띠부씰,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찰흙을 구워만든 필통, 작년에 선물 받고는 한 번도 쓴 적이 없이 침대 옆 구석에 처박혀서는 양말 벗어놓는 곳으로 전락한 공가방까지, 의자에 옆으로 앉아 가리키는 곳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가며 대답하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자기 소유의 웃음보가 남들보다 허약해서 픽픽 잘 터지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맥락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오미네에게 나도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머릿속에 떠오른 그 문장마저 너무너무 웃겨서 아니 두 자 겨우 말하고 타카오는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야, 뭔데. 같이 좀 웃자.”
“아니…몰라…아씨 왤케 웃기지?!”
“너 진짜 별 게 다…풋.”
폭소의 특징을 하나 꼽자면 쉽게 전염된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분명 조금이나마 어이없다는 기색이던 아오미네도 말을 다 맺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는 다이쨩은 왜 웃는데?!”
“너 때문이거든! 아 미친, 뭐야 이거…!”
“무슨, 으흐흐…중딩들도 아니고….”
불의의 웃음을 맞이하여 제각각 책상과 자기 무릎 위에 엎어져 웃음의 파도가 지나갈 때까지 그저 버텨낸 두 청소년은 간헐적으로 피식거리며 힘이 빠진 몸을 축 늘어트렸다. 아까 생각해뒀던 ‘뭐하고 놀 것인가’에 대한 답이 그 새 날아가 버려 타카오는 다시 한 번 이제 뭐하고 놀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다이쨩 게임할래?”
“뭔데.”
“스쿨호러슈팅액션? 2인 플레이 가능!”
“호러? 많이 그…무섭냐?”
“별로…? 깜짝 놀라는 대목이 많아.”
“슈팅이면 총 쏘는 거야?”
“응, 아쉽게도 컨트롤러는 그냥 이거지만.”
제법 흥미를 보이는 아오미네에게 사용한 티가 나는 컨트롤러를 장식장에서 꺼내어 건넸다. 꽤 의욕을 보이는 그를 침대에서 내려오게 해 바닥에 앉히고, 콘솔과 TV를 켠 타카오는 그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침대에 적당히 등을 기대면 딱 편한 자세가 된다. 간단한 조작법을 알려주고서 튜토리얼을 생략해 본게임에 들어가자마자 아오미네는 적뿐만 아니라 타카오를 포함한 아군 전원에게 총질을 했다.
“…이거 우리 편도 맞아?”
“맞는다니까! 아이구 아파라 나 피 까인 것 좀 봐!”
남의 편도 아니고 우리 편한테 맞아 죽겠네! 가볍게 호들갑을 떨자 아오미네는 좀 조심하는 것 같더니 결국엔 타카오가 나중에 하려고 미뤄뒀던 ‘아군을 헤드샷으로 사살하기’ 업적을 달성하고 자진해서 컨트롤러에서 손을 떼었다. 멋쩍게 하는 변명이, 1p 마커가 보이면 반사적으로 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게임을 바꿀까 했더니 크게 기지개를 켜면서도 그럴 거 없다는 것이 아오미네의 대답이었다.
“구경만 하면 심심하잖아.”
“안 심심한데? 잘하네. 어떻게 될 지도 궁금하고.”
“그래? 하긴 화면 두 개로 가르면 잘 안보여.”
다리를 쭉 뻗고 관전할 자세를 취한 그를 옆에 앉혀두고서 능숙하게 게임을 진행한다. 두 번째 보스를 격파한 뒤에 나오는 동영상을 스킵하려다 아 이건 좋아, 하고 멈췄을 때 슬쩍 어깨가 닿아왔다. 더운 날씨 때문에 되도록이면 서로 닿지 않도록 거리를 약간 두고 있던 그들 사이에 딱 한 군데 만들어진 접점이었다.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한 에어컨 덕에 피부가 약간 서늘해진 탓인가 크게 덥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그 닿은 부분을 떼어낼 수도 있지만 타카오는 그냥 모른 척, 가끔은 장난스레 어깨로 밀쳐가며 그와 어께를 붙인 채로 있었다. 세 번째 보스전을 앞두고 장비를 점검할 때쯤에는 등 뒤로 팔이 뻗어있었다. 팔을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어깨를 감쌌다기보다는 침대 위에 올려뒀다에 가깝기는 해도 등에 조심스레 닿은 채였다. 그 시점에서 이쪽에서도 뭔가 행동을 해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뭔가 적극적인 의사표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것까지는 괜찮다는 표를 내줘야 할 것 같았다. 남의 무릎 위에 다리 한 짝을 척 올려놓고 보스전을 클리어하는 동안은 별 다른 반응이 없더니 보스전이 끝나면 좀 집적거려서 집중을 방해해도 된다고 생각하는지 발을 꽈악 힘주어 잡았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욧!”
“마사지?”
“왜 때문에 의문형이야?”
“죽어보라고?”
“으억 아퍼!! 살살!! 우와 겁나 아퍼!!!농담 아냐 진짜 아퍼!!!!”
물론 제대로 된 마사지는 아니지만 발등 쪽을 감싸고 꽉꽉 쥐어짜대니 지압효과가 제법이었다. 죽는 시늉을 하며 몸을 배배 꼬던 타카오는 손이 떨어지자마자 다른 발도 내밀었다.
“효과 한 번 제대론데? 이쪽도.”
“신났지 아주.”
“다이쨩이 시작했잖아?”
그러자 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선선히 다른 발도 쥐어짜주었다. 슬쩍 훔쳐본 얼굴은 들떠있지 않고 의외로 담담했다. 뭔가 열심히 생각 중인 눈치였는데, 그가 세우는 계획은 본인의 진지함을 따라가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이 귀여운 수준에서 그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타카오는 방해하지 않고 가만 지켜보기로 했다. 사람이 뭔가에 몰두하는 모습은 대개 보기 좋은 법이었다. 꼭 오늘 내로 실행할 계획이란 보장도 없으니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슬슬 출출하네. 저녁 뭐 먹을래?”
“아니, 슬슬 가야지.”
“잉 벌써?”
“어. 남의 집에 너무 늦게까지 있는 거 아냐.”
“유딩 때나 듣던 소리가 다이쨩 입에서 나오니까 이상하다.”
“상식이잖아?”
저녁때가 되도록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아오미네가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툭 뱉은 말이었다. 네가 상식을 신경 쓰는 그런 애인 줄은 몰랐다고 익살을 떨까 하다 관뒀다. 침대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보고 앉는 사람이 침대에 허락없이 털썩 앉았다가 봉변을 당한 경험이 있을 확률 보다는 그냥 어릴 때 가정교육을 잘 받고 그 때 배운 것들을 지키는 사람일 확률이 크다. 아오미네 다이키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의외로 느껴지는 거지, 여태 그 아오미네가 보인 모습을 고려하면 이상할 건 없었다. 벗어뒀던 양말을 주워 신는 그의 곁을 알짱거리며 기다리다가 배웅하러 따라나선다. 적어도 버스 정류장까지는 바래다 줄 생각이었는데 그가 손을 들어 말렸다.
“나오지 마.”
“응? 아냐 정류장까지 가는 거 봐야지.”
“아니, 그게 아니라….”
할 말이 있는 눈치라 응? 하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던 아오미네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귓속말인가 싶어 귀를 가까이하려 살짝 돌아가는 뺨에 손을 대어 움직임을 멈추고는, 그 고교 최속이 맞나 싶을 정도로 느리게, 아주 천천히 다가와, 타카오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어….”
“…놀랐어?”
성립할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놀랐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아주 갑작스런 짓도 전혀 아니다. 오히려 완벽한 타이밍과 분위기였다. 교제하는 보통의 이성 간이라면, 혼자 있는 집에 불러들여 노닥거리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완벽하게 OK사인이다. 타카오가 반대 입장이었다면 방 구경 중에 웃어댔을 때 은근슬쩍 끌어안았을 것이다.
아니 그치만, 이성 간이 아니잖아?
동성 간이긴 하지, 그러니까 친구부터 시작하자 운운했던 거고. 여자애였다면 친구부터 소리는 하지 않았을 거다.
뭐가 어찌됐든 아오미네는 충분히 신호를 했고 타카오는, 비록 의도를 야악간 오해하기는 했지만 거기다 대고 ok ok 얼마든지! 하고 초록불을 켜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해볼 일이긴 했다. 둘 다 팀스포츠를 하고 있으니 시커먼 남자놈들끼리 끌어안는 것쯤이야 별 일 아니고, 남자 벗은 몸에도 야유는 해도 거부감은 거의 없다. 그 몸뚱이가 성적인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야지만 반응다운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타카오는 자기 반응을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얼굴이 가까운 아오미네가 타카오의 모든 곳을 힐끔거리며 대답이나 그에 준하는 뭔가를 찾아내려 조용히 애쓰고 있는 걸 보면서도 그냥,
“어, 그냥…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
“응. …여기다 해봐.”
입술을 가리키자마자, 마음이 급했는지 이번엔 재빨리 입술이 다가왔다가 코앞에서 멈칫했다. 이번에도 눈을 감은 채였다. 너무 급하게 들이대서 놀래키는 게 아닌가 걱정이라도 되는지 급정거한 그에게 이번에는 타카오 쪽에서 입을 맞췄다. 입술을 살짝 내밀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 아주 쉬웠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감이 왔다. 아오미네가 몸을 바로 펴고 최후 통첩을 기다렸다. 와, 하고 감탄하며 타카오는 다시 한 번 초록불을 켰다.
“나 너랑 사귈 수 있을 거 같아.”
몇 달 동안 이어진 친구 사이를 관두고 애인이 된 기쁨을 가누지 못 하기라도 했던지 인터하이에서 아오미네는 펄펄 날았다. 결선 리그 때 엉망이었던 다른 선수와의 연계도 이제는 못 봐줄 수준은 면해서, 기적의 세대를 멈추기는 어려우니 그러면 패스 받는 쪽의 발을 묶어보겠다고 파을을 유도했지만 이쪽은 또 작년 윈터컵에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상대팀에 자유투를 내주었던 것이 천추의 한인지 걸려들지 않았다. 그 때 뻥 차버렸으면 지금보다 덜 팔팔했으려나? 다만 아무러한 아오미네도 에이스님을 경기 내내 마크하려니 힘에 부치는지 4쿼터 막바지에는 눈에 띄게 방전 된 모습을 보였다. 그 체력을 다지려 우리 에이스가 어떤 노력을 쌓아왔는지 아는 타카오의 눈에는 더 없이 흡족한 장면이였다. 마는, 그래도 슈토쿠는 이기지 못했다. 감독님이 왜 매 경기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센터들만 쳐다보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인터하이 3위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지난겨울과 똑같은 구도로 슈토쿠에 진 카이조는 어째 분위기가 험악했지만, 카이조도 관록이 깊은 곳이니 팀 분위기 정도야 자체적으로 정화할 것이다. 남의 팀보다는 우리팀의 OB를 신경쓸 때였다. 다른 스타멘도 아니고, 드라이브가 늘었다는 칭찬에 조금, 정말로 개미 코딱지만큼 우쭐했다가 미야지 형제의 손에 의해 장기 밀매업자에게 넘겨질 위기에 처한 타카오 카즈나리라면 더욱 더.
“우왁, 좀 말려주세요 선배!”
“뭐? 괜찮아 괜찮아, 안 죽어.”
“죽지만 않는다는 말로 들리는 뎁쇼?!”
“야, 누가 들으면 우리가 협박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그래 새꺄, 누굴 *****한 *****로 알어 확 그냥….”
시합을 보러 온 OB 거의 전원과 말을 튼 사이인 파트너와 대조적으로 미도리마는 오오츠보와 조용히 안부를 주고받는 게 다였다. 졸업한 선배들을 발견하자마자 정중히 목례하는 모습에 1학년 미도리마 신타로와 함께 한 사람들 모두가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지금의 에이스님은 선배님들에게 보여 널리 자랑해 마땅한 미도리마 신타로라는 타카오의 주장이 맞았던 셈이다. OB들의 모임은 물론 모교의 경기를 관람하기 위한 자리였지만, 동시에 슈토쿠 농구부 OB 동창회의 성격 또한 매우 강하게 띠었다. 두루두루 돌아가며 알고 지내던 후배와 감독님께 인사를 마친 그들은 마지막으로 모여 나카타니 감독에게 입을 모아 인사한 뒤 올 때처럼 우루루 몰려서 갔다. 졸업해서까지 농구 경기를 보러 온다는 점에서 이미 검증됐지만, 대학에 가서까지 동아리가 어떠네 성적이 저떠네 코트가 별로네 하는 소리를 여자 아이돌 얘기처럼 열을 올려가며 하는 걸보면, 참 어지간히도 농구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타카오가 아오미네와 만나는 마지버거는 딱 번화가에 자리한 탓에 마주앉은 남고생 2명쯤이야 이상할 것 없는 그림이었다. 고등학생이 바글대는 지역이고, 그러니 세이린 농구부의 빛과 그림자와 마주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아오미네와 카가미와 쿠로코 사이에 끼게 된 타카오는 제법 난감한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세 사람이 있고 그가 나중에 합석했거나 그 반대라면 아무 문제없다. 그는 자기들끼리 지인인 초면의 세 명 사이에 끼어서도 삼십분 후에는 처음부터 동행인 양 사이에 섞여 들어갈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오미네와 타카오, 카가미와 쿠로코가 마주치는 상황은 아주 달랐다. 바닐라쉐이크 한 잔을 먼저 받아들고 앉은 쿠로코는 별 말이 없었고, 그 대신인 것처럼 시간이 꽤 지난 후 쟁반 가득 햄버거만 받아온 카가미가 의자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미도리마는?”
“니가 걜 왜 찾아?”
“아니, 타카오가 있길래 당연히 있는 줄 알았는데. 뭐야 그럼 너희 둘이야?”
우연히 만나서 합석했다, 주로 내 의지로. 라고 해명하면 자연스러울 테지만 그걸 아오미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쯤이야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안 친한 사이라고 뻥치면 신경 쓰려나. 신경 쓰이겠지 역시. 네 맘대로 하라는 뜻으로 마주 앉은 PF의 발을 툭 치고서 입을 다물자 힐끔 타카오를 본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왜, 내가 얘랑 있으면 안 되냐?”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닌데….”
“고등학생은 새 친구 사귀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그치?”
“하, 뭐. 그렇긴 하지.”
“왜, 너도 껴줘?”
“그런 건 내 쪽에서 사양이거든?!”
“카가미군, 그보다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요….”
“아? 뭐였는데?”
“아키타에 간다는.”
“아. 타츠야 우승 축하도 할 겸, 간만에 얼굴 좀 보자고 타츠야네 부모님이 내 생일도 겸사겸사…”
“그 형아네 팀에 박살이 나서 일찌감치 탈락하고도 쫄래쫄래 그 먼 아키타까지 갈 생각이 잘도 드는 군요, 카가미군은.”
“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너 쟤네한테 졌다고 모모이랑 안 볼 거냐?”
“사츠키 씨는 매니저잖아요.”
아오미네가 우뚝 정지했다. 경악에 얼어붙은 시선을 눈치 챈 쿠로코가 찬찬히 설명했다.
“아오미네 군이 아는 그 사츠키 씨 맞습니다.”
“뭐???”
“다른 사츠키를 만난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설마 모르신 겁니까?”
“안 가르쳐주는데 어떻게 알아?!”
“꽤 됐는데요.”
“꽤 됐는데.”
왠지 카가미의 뒤를 이어 꽤 됐는데? 하고 말해주면 아오미네를 매우 큰 충격에 빠트릴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타카오는 얌전하게 잘 참았다. 아오미네가 상황을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훨씬 재밌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꿉친구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현실과 마음의 준비도 없이 맞닥뜨린 그는 지금 뭘 물어봐야할 지는커녕 자기 손을 어떻게 두고 있어야 맞는지 조차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쿠로코는, 어디까지나 타카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왠지 모르게 통쾌하다는 눈초리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카가미에게 눈짓을 해보아도 저편의 파워포워드는 실마리를 주기는 고사하고 자신이 뭔가 눈치 받을 구석이 있나 스스로를, 특히 입 주변을 중점적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이 우스꽝스럽고 부자연스런 침묵을 버틸지 깨버릴지, 타카오도 잠시 생각에 잠겨보기로 했다. 이윽고 콜라 빨대를 문 아오미네가 뭔가를 웅얼거렸다. 용케 알아듣고 쿠로코가 대답했다.
“2월 초부터요. 좀 걸렸죠. 사실 마음 같아서는 윈터컵 우승컵 든 채로 붙잡아서 고백하고 싶었는데, 소꿉친구 누구누구 씨가 혼자 두질 않아서.”
“너 꼭 내 탓인 것처럼 말한다…?”
“다른 사람 다 비뚤어져도 아오미네 군만 멀쩡했더라면 저희 지금 500일 넘었을 겁니다.”
“헤에. 하긴, 집안에 우환이 있는 아가씨한테 나랑 사귑시다 하긴 어렵지.”
“예, 우환도 그런 우환이 없었죠.”
가볍게 맞장구를 치자 쿠로코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오미네는 어떤가 하면, 뭔가 안 좋은 취급을 당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캥키는 구석이 또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 뭐라 할 말이 없는지 그저 불만스런 표정이고, 카가미에 이르러서는…아마 우환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를 맥락으로 간신히 파악해 얘기를 따라잡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귀국자녀가, 아아… 하고 자기도 안다는 티를 내버렸다. 즉, 이 자리에서 멀쩡하지 못했던 아오미네에 대해 모르는 건 타카오 뿐인 것이다. 즐겁게 아오미네 다이키를 린치하는 분위기에 편승해 그래서, 어떤 우환이었는데? 묻자 쿠로코가 눈을 빛냈다. 테츠, 부르는 목소리가 거의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그 위압감은 저 환상의 식스맨에게 그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엄숙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긴 이야기가 됩니다만…하는 서두대로 정말 꽤 긴 이야기였다.
간간히 아오미네가 끼어들어 자기변호를 한 보람도 없이, 이야기가 끝났을 때 타카오에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빛과 그림자에 대한, 당사자들의 태도였다. 얘들은 진짜 쪽팔린 줄을 모르나? 팔릴 쪽이 없는 건가? 아무튼 그런 중학 생활을 보냈다면야 얘나 쟤나 걔의 이렇고 저렇고 그런 언행들도 이해가 갔다. 그대로 자라났구나, 기적의 세대. 그리고 지난 윈터컵 세이린의 뒤를 안돌아보는 전력투구에 어느 정도 쿠로코의 개인감정이 영향을 준 구석이 있겠구나, 하는 것 정도. 그 이상은 왈가왈부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오미네가 쿠로코의 빛이 된 것도 재능의 격차가 독이 된 것도 패배가 아오미네를 바꾼 것도 타카오가 전혀 관련되지 않은, 이제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요소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과거의 사건이니까. 날 이길 수 있는 운운하는 감성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뭐어, 미도리마 신타로가 현실로 존재하는 마당에.
“모모이가 걱정할 만도 했네.”
“예 예 그렇습죠, 그 시절의 소인은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의 제일 예쁜 추억이자 덩치는 큰 주제에 귀여운 맛이 있는 에이스였습니다 그랬던 게 이렇게 제가 되었습니다.”
“네? 누가 그래요?”
“사츠키….”
“동감이긴 합니다만.”
“여친 생기면 본래 사람이 다 이렇게 표리부도 나냐?”
“표리부동 얘기지? 팔이 좀 안이 굽을 순 있지만 저 정도는 드물 걸?”
“동감이란 건 정말인데요.”
“숭하게 자라나서 정말 송구합니다 나원 참.”
“에이 왜, 난 내가 아는 다이쨩이 좋은데.”
나도 직접 보면 생각이 바뀌려나? 라고 농담을 할 생각이었는데, 세이린 학생 두 명이 아까 사츠키 씨 소리를 들었을 때의 아오미네와 비슷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뭐 이상한 말 했어?”
“아뇨, 그렇진 않지만….”
“세상 다 끝난 얼굴 한 번 해보더니 좀 성격이 좋아지긴 했지….”
“친구 잘 사귀란 말이 이래서 있는 거구만.”
“야, 니가 지난날에 한 일들을 생각해보지?”
“…거기까지 하자, 버거 하나 사줄 테니까….”
“자기 언행이 어땠는지 자각이 있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입니다.”
쿠로코의 어조가 이번에도 제법 신랄했다. 속을 무진장 썩인 미운 놈이기는 한데, 또 지난 날의 정이 두터워 작년에는 일단 예전의 아오미네 군으로 되돌려 주십사 램프의 요정이라도 불러낼 기세로 열심히 뛰었지만 정작 충격요법을 성공하고 한숨 돌리고 보니 다시 슬그머니 미운 마음이, 아주 미운 정도는 아니고 얄미운 마음이 그냥 좀 골탕 먹이고 싶은 정도로 스물스물 올라오는 게 아닐까 타카오는 추측했다. 양가감정이라면 그도 한창 겪어 보았다. 천재란 것들은 그냥 옆에서 생활하는 정도의 사이에게도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단한 물건들이다. 반대로, 그 정도는 되어야지 천재라고 불리는 걸 테지. 다행히도 미도리마라면 모를까 아오미네와 합을 맞춰 플레이할 예정은 없으니 이 시커먼 기적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들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타카오에게 아오미네는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의 제일 예쁜 추억이 아니라, 앞으로 남길 추억을 같이 만들어갈 짝이다.
먹고 한 판 땡기자는 말에 얼굴을 확 밝히는 카가미와 대조적으로 쿠로코가 한숨을 쉬었다.
“아쉽지만, 선약이 있어서….”
“누구, 키세?”
“니들 친구가 그렇게 없냐?”
“카가미 군, 좀 더 돌려서 말해주지 않으면 상처 받을지도 모릅니다. 바보한테 바보라고 놀리면 못 써요.”
“너처럼 돌려 까는 쪽이 배는 상처 받거든?! 그럼 누구?”
“저희 동기랑 후배들이요. 아오미네 군도 학교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지내요.”
“유치원생 대하는 말투다 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유치원생 처남에 가까운….”
“얌마 테츠!”
중학교 때로 화제가 넘어가 잊고 있던 소꿉친구의 남자친구라는 최흉최악의 문제를 다시 떠올린 듯 아오미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돈 주고도 못 볼 구경이란 건 이런 데 쓰는 말이지 싶다. 소리죽여 웃으며 커다란 어깨를 두들겨주어도 기운을 못 낸다. 대각선 자리의 카가미는 아오미네와 플레이할 기회를 놓치는 게 못내 아쉬운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지막 치즈버거를 느릿느릿 먹어치웠다. 둘과 헤어져 마지버거를 나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카가미에게 원온원을 권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오늘은 이후의 예정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짜려니 아오미네가 완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라 의견을 묻기도 난감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타카오는 여태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다.
“다이쨩, 카페에 있다 갈래?”
“어 그러자….”
잘 알고 하는 대답은 아니라는 티가 났다. 가게 안에 들어와 카운터의 메뉴를 마주한 뒤의 얼굴에도 그렇게 쓰여있었다. 난 이미 충분히 힘겨운데 세상에 왜 나한테 이렇게 나쁘게 굴지? 라는 표정이면서도 음료는 제대로 시켰다.
“아이스 화이트 모카라떼.”
…제대로 고른 거 맞나?
“화이트 모카?”
“맛있어.”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맛있다고 하니 먹어본 적 있는 거겠지. 본인의 선택을 존중해 더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커피가 나오길 기다려 좀 구석진 곳에 자릴 잡아 앉자마자 아오미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방금까지 맞은 편 자리에서 그가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지켜본 타카오가 손을 뻗어 그의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는 위로를 받아 더 감정적으로 변했다.
“그럴 줄 알고는 있었는데….”
“으응? 뭐가, 쿠로코랑 모모이?”
“어. 사츠키가 하도 테츠킁거리면서 쫓아다니니까 한 번은 사귈 줄은 알았지. 근데…테츠는 별로 관심이 없는 거 같았는데….”
“그랬어?”
“음. 보통 여자가 들이대는데 좋으면 뭐 이렇게 손도 잡고 그러지 않나?”
“다이쨩 몰래 한 거 아니고?”
“어떨 땐 테츠가 오늘 수건 고맙다고 먼저 말 걸어줬다고 나한테 호들갑떨던 녀석인데?”
“그치만 실제로 지금까지 둘이 사귄다는 거 몰랐잖아?”
그러자 더는 할 말이 없는지 끙, 신음한 아오미네가 나 문자 좀. 하고 양해를 구했다. 정말인지 물어보려는 거겠지. 아주 어린 애들이 발랑 까져서 몹쓸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인가? 의아해진 타카오의 물음에 그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 되는 건 아니지.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둘이 사귄다는 생각을 하니 또 눈앞이 캄캄해지는지 아오미네가 시무룩하게 휘핑크림을 무너트렸다. 구경하는 입장에선, 참. 어린애 같고 귀엽네.
타카오는 그런 자신의 감상에 입술을 내밀고 잠시 수정안을 고심하다가 결국 그냥 그대로 두었다. 예쁘고 곱거나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러운 사전적인 귀여움은 아니어도 귀여운데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하지 뭐라고 하나. 이윽고 아오미네가 그의 눈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진짜래….”
무슨 고명딸 시집보내는 아버지라도 된 듯이 비통해 하는 그를 한동안 어르고 달래서 겨우 보통 기분으로 되돌려 놓았다. 시간이 꽤 걸렸고, 이 일로 타카오의 머리 속에 쿠로코♡모모이 커플=다이쨩이 싫어함 공식이 성립되었고, 덤으로 쿠로코에게 느끼는 동질감이 조금 더 짙어졌고, 당연히 동족혐오도 딱 그만큼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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