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End -3-
전야제
D-4
아침, 미도리마는 여느 때와 같이 오하아사를 확인했다. 부원의 다수가 순위가 낮다면 해당 별자리의 럭키아이템을 챙겨 연습에 나가기 위해서였다. 물론 2월29일생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누구나 해당하는 별자리가 있고 따라서 농구부전체의 총합을 내본다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할테지만, 그날의 경향성이란게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 1순위인 처녀자리는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다. 슈토쿠 농구부 1군은 현재 염소자리가 적고 그 다음으로 사자자리가, 또 반대로 물병자리가 많은 편이었다. 그러니 물병자리가 최하위인 날엔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보니 아오미네가 이맘 때 생일이지. 방학 마지막 날이니까 맨날 가족이랑 동네 친구들만 선물 준다고 바닥은 안닦고 투덜거렸던 날을 기억한다. 그래서 뭐랬더라, 방학숙제를 제대로 끝마친다면 선물 쯤 줄 수도 있다고 대꾸했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 멍청한놈은 생일날까지 미루고미루다 울며불며 밤새 밀린 일기를 쓰고는 개학식 내내 보란듯이 졸아댔기때문에 미도리마는 데굴데굴 연필의 포장을 풀어 책상서랍에 다시 가지런히 넣었더랬다. 그 연필은 지금 카가미에게 가있다. 캐스터가 생글생글 웃으며 오늘 게자리와 상성이 좋은 별자리를 소개한다. 방송에 다시 집중하며 미도리마는 그 일을 머리 속에서 털어버렸다.
아오미네는 이미 가장 원하던 것을 받았다. 손쓸 수 없는 문제,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해결할 방안이 없던 좌절은 지난 겨울 그에게서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할 일 뿐이었다. 그런 아오미네에게 미도리마가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모이 편으로 인사라도 한 마디 보내면 되겠지.
"오늘 게자리와 상성이 좋은 별자리 순위는...."
미도리마는 자기가 그의 생일을 기억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D-3
수고하셨습니다! 일사분란한 인사가 천장이 높은 체육관을 울린 뒤, 1학년들은 잡담을 주고받으며 각자 맡은 청소구역대로 삼삼오오 흩어졌다. 평소처럼 재빨리 청소를 마치고 연습 후의 방학을 만끽할 생각에 들뜬 그들을 불러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에이스였다.
“저기, 혹시 농구화샵 잘 아는 사람 없슴까? 한정판 취급하는 곳이라거나...가격은 좀 비싸도 괜찮은데.”
“어? 인터넷에서 사는게 편하지 않을까요? 한정판 뭐 찾으시는데요?”
“딱히 찾는게 있는건 아니고, 그냥...낼 모레까진 나한테 와야되는데 넷에서 시키면 다음주나 되야 오잖아.”
“아하.”
“뭐야 키세, 여친하고 커플 농구화라도 맞추려고?”
“선배 그래서 여자친구가 없는 검다...만에 하나 생겨도 농구하는 애 아닌 이상 그런짓 하지마세여....”
“아 키세선배, 저 아는 형이 좀 작게 그런 거 하거든요.”
“진짬까?!번호 알려줘!”
“진짜 여친 아니야?”
“선배 농구 좋아하기까지하는 사람 찾다간 모리야마 선배처럼 됨다? 글고 여친이면 대충 유행하는 악세사리랑 꽃이면 통ㄱ”
“얘들아 이 남자의 적을 매우 쳐라!!”
잠시간의 소요가 진정된 후 양해를 구하며 먼저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키세는 누가 봐도 신이 나있다. 꾸준히 여친 혹은 썸녀설을 주장하는 하늘같은 3학년 선배의 하늘 안 같은 말에 후배들이 끄덕거릴만도 했다. 키세 스스로도 전화를 걸어볼 때 자기 목소리가 정말로 신이 났던 것쯤 알고있다. 아오미네는 중학생때부터 농구화를 모았다. 그렇지만 그때에는, 자기한테 없는 모델을 선물한다고 그가 기뻐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키세는 아오미네에게 뭘 선물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목표가 무언지 아는 지금은 그냥 노력해서 성취하기만 하면 된다. 어지간한 라인이라면 거진 한 켤레씩 가지고 있겠다마는 기적의 세대 에이스는 색깔에도 의의를 두었다. 키세는 그가 사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들어할 농구화를 분별해낼 자신이 있었다.
D-2
잠시 휴식!
똑부러지는 감독의 지시에 바쁘게 움직이던 1학년들이 큰 한숨을 내쉬며 편히 눕거나 엎드린다. 카가미가 대표로 신음했다.
“농구하고싶다..입니다..”
“지랄마 똥멍청이들아!!지리랑 타케야마 수학은 남기니까 숙제 미리 해두라고 했어 안했어!!!”
“키요시선배 덕에 모두들 시험은 무사히 넘겼는데...”
후리하타의 한탄에 2학년 전원이 한숨쉬었다. 이번 인터하이, 세이린의 성적은 저조했다. 하루도 아까운 시기에 방학숙제 안 해갔다는 이유로 부원들의 연습시간이 주는 건 안될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착실하게 매일 조금씩 해나갔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런 상궤를 벗어난 성실함을 지닌 고교생은 슈토쿠에서나 한 명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1주일 간격으로 잊지말고 챙겨하면 된다는 태평한 소릴하며 3학년 포워드가 주스를 후배들의 컵에 따라주었다. 아 전 괜찮습니다, 하고 작게 사양한 식스맨이 표정변화없이 종이컵에 꽂힌 빨대를 빤다. 컵 표면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야 쿠로코, 너 그거 빠져나와서 사온거지.”
“모함입니다감독”
“하하하,물 맺힌거 보니까 처음 올 때 들고 온 컵은 아니네.”
“쿠로코구운..?”
“화, 화장실 좀..”
“어딜, 못간다!”
주장의 분노보다 감독의 철권이 빨랐다. 단호하고 신속하게 들어가는 레슬링기술에 겁에질린 1학년들의 옹기종기 모인 머리를 키요시가 한 번씩 쓰다듬었다.
“자 다시 시작해볼까? 어짜피 해야하는거, 즐겁게 가자!”
“숙제를 즐겁게 하자는 건 네놈뿐일거다!”
“그런가? 싫은 일은 빨리 끝내서 치워버리는게 속 편하지 않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요.”
“그리고 만약에 오늘 일찍 끝나면, 다같이 바다라도”
“데려가서 또 지옥특훈 같은거 시킬거잖아요 다 알아요!”
“이런 들켰나?”
“..키요시, 애들이 믿는다.”
“음? 정말로? 농담인데..”
거실 벽에 걸린 깨끗한 달력을 바라보며 코가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방학 동안도 계속 연습에 합숙이다 뭐다해서 제대로 논 적은....으음 실은 있지만! 아무튼 다같이 어디 놀러가면 좋겠다!”
“그렇지? 어때 리코? 안될까?”
“안되고 자시고 쉬라는 때 안 쉬는 얼간이들은 앓아누워도 난 몰라!”
“감독...”
“감독니임...”
“........가까운 곳, 반나절 정도면 되려나.”
“야호!!!!”
부원들이 환호하고, 눈썹 위를 긁적인 리코가 쿠로코 위에서 물러나온다. 죽은 듯이 엎드려있던 그는 학생회부회장과 선도부의 선배 둘이 간단한 예산책정을 끝낸 후에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수학문제를 꾸준히 그리고 일정하게 막혀가며 어떻게든 숙제를 해나가던 카가미가 왜 아예 해질 때까지 누워있지, 하고 구박을 했다. 그의 옆구리를 손날로 가차없이 후빈 쿠로코가 바로 앉아 한숨을 쉰다.
“벌써 29일이라니...곤란한데요.”
“왜요 선배?”
“31일 날은 선약이 있어서요. 그 전에 일을 다 처리하려고 했는데...”
“뭐, 놀러가는거? 일찍 자면 되잖아.”
“남 일이라고 그리 쉽게 말하지 말아주세요. ...그보다 카가미군, 일요일에 약속 있습니까?”
“아니?왜.”
“그럼 저랑 같이 아오미네군 좀 만나지 않겠습니까. 아오미네군 뿐 아니라 키세군과도 할 수 있을 겁니다, 1on1.”
“숙제를 오늘 내로 다 끝낸다면 말야.”
“아.”
“아......”
“왜, 무슨 날이야 31일? 또 중학교 동창회?”
“아뇨....아오미네군 생일이라서. 중학교 때는 그럴 계제가 아니었고, 해서.....축하한다고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2호를 불러 다리 사이에 앉힌 쿠로코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조금 긴장되네요...”
D-1
“사츠키, 내일 다이키 생일이지?”
“.....아, 맞다!!!”
“얘는, 온 부원 신변잡기는 다 알고 다니면서 그런걸 잊어먹고.”
“아아니...그치만 가족들 생일 같은 건 내가 신경 안 써도 지금처럼 누가 알려주고 그러잖아요....”
“선물은 뭐 생각해 뒀니?”
“응! 저번 주였나 미니게임 때 잡아당겨서 소매 솔기 터진거 그냥 입고다니니까, 연습 때 입을 티나 사주려고.”
“그걸 그냥 입고다녀?”
“연습 때만 입으니까 그냥 모르나봐요. 남자애들은 진짜 단순하다니까.”
“다이키는 특히 좀 그렇지..”
더위와 합숙, 연습으로 얼룩진 방학이 오늘로 끝난다. 학교 갈 준비, 즉 책가방에 필통이 들어있나 확인하고 챠리어카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간단한 정비를 이미 마친 타카오는 자기 전까지 만화책을 볼까 아니면 카드 정리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의외의 인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 오랜만이야 다이쨩. 방학 숙제는 했어?”
「어. 뭐. 나 오늘 생일인데.」
“뭐???? 진짜??????? 내일 아니고 오늘??????”
「어 오늘. 선물은 너 전에 보여준 몬스터, 도마뱀 꼬리 달린 너 세 장 다 채워넣는 거 한 장 줘. 여분 있댔지.」
“어…응. 그걸로 돼?”
「어 그거 갖고싶어.」
그 이상의 여지를 주지 않고 확정 짓는 대답이었다. 타카오는 방금 튀어나간 반사적인 질문이 지금 자기를 가장 잘 대변하는 말임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그거면 돼? 전에도 같은 사람에게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겨우 삼사 개월 전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아무튼 아오미네는 처음부터 그랬다. 이미 그와 어울리기로 마음을 정한 타카오가 반대로 당황할 정도로 사소하고 별거 아닌 부탁만을 했다. 왜 그런 게 갖고 싶어? 고작 그걸로 만족해? 생일인데? 나한테 더 많이, 더 크게 바라도 되는데? 정확히는, 그래줬음 좋겠는데! 한 번 더 진짜 그거면 돼? 하고 묻자 전화 너머에서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거면 돼. 아무래도 처음 전화를 걸 때부터 생일선물로는 카드를 달라 하기로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타카오는 끈질기게 매달리는 대신 다음 사안으로 재빨리 넘어갔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이쨩. 생일이다 소릴 왜 이제야 해? 내 축하가 그렇게 받기 싫었어?”
「뭔 소리야 임마. 하루 종일 바빴다.」
“음. 축하받고 노느라 바빴어?”
부러 밝은 목소리와 심술궂은 말투로 묻자 두 시간 뒤 생일이 끝나는 연인은 단박에 당황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허둥대는 목소리에 타카오가 씩 웃은 줄을 이제는 보지 않고도 쉽게 짐작을 할 텐데, 그래도 빠르고 정리되지 않은 변명이 기계를 통해 들려온다. 사실 어젯밤에 문자 받자마자 니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니 생각은 아니고 아 씨, 12시 땡 치니까 문자가 왔단 말야. 무라사키바라는 예약문자고 키세가 문자 보내니까 난 당연히 너도 연락 올 줄 알았다고. 근데 한 시까지 아무것도 없대? 그래서 걍 잤지.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미역국 먹으면서 깨달은 거야 아, 얘 내 생일 모르는구나.
“그때 전화하지.”
「쪽팔리잖아!」
“그게 쪽팔려? 뭐가?”
「생일이니까 축하해달라는 거 같지 않냐?」
“그거 안 해서 나한테 축하한다 소리 못들은 거잖아?”
그러자 아오미네는 아―하고 길게 한 번 끄는 소리를 냈다. 그렇기는 한데, 라는 수긍과 같은 표현이었다. 그 소리에 타카오는 약간의 승리감을 느끼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고개를 돌리니 의자 등받이에 걸린 교복 셔츠가 보인다. 작년 경험에서 미루어 짐작해보면, 2학기 개학날이니 부활동이 있긴 해도 체력테스트가 주가 될 것이다. 그러니 뭐 각별히 일찍 잘 필요는 없다고 봐도 되겠지. 애초에 시간이 그렇게 많이 들 일도 아니고, 아오미네도 수다를 오래 떨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타카오는 물었다.
“그러면 그 다음엔 뭐 했어? 미역국 먹고.”
「아침 먹은 거 치우고, 부모님 출근하는 거 배웅하고..」
“생일 축하해 우리 아들~ 소리 들었어?”
「어. 한 번씩 안아주고 저녁에 사츠키랑 케잌 사올 돈 있냐고 용돈주고. 누구 생일이면 우리가 케이크 사오거든.」
“그래서 모모이양이랑 케이크 사러나갔어?”
「아니 나중에.」
대답하며 타카오의 연이은 질문 뒤의 의도를 파악한 아오미네는 뒷목을 긁적였다. 왜 그런 걸 알고 싶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알려줘서 타카오의 기분이 풀린다면 기꺼이 요구에 응할 생각이었다.
생일이 됐든 방학 마지막 날이 됐든 8월 31일이 방학이란 사실에는 변함없다고 아오미네는 생각했다. 그래서 출근하는 부모님을 배웅한 뒤 그는 소파에 드러누워 재미없는 버라이어티 쇼와 아침 드라마, 아동 프로 사이에서 열심히 채널을 돌리다 그대로 다시 곯아떨어졌다. 이놈저놈 피할 사람 많은 학교가 아니라 안락한 집에서 늦잠을 자기란 방학 때만 누릴 수 있는 호사 중의 호사였다. 모모이가 들으면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일 소리지만. 물론 아오미네라고 그날 일정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드러누운 것은 아니었다. 쿠로코는 미도리마만큼은 아니어도 보기보다 깐깐한 구석이 있는 데다 말에 가차까지 없다. 점심 즈음에 만나기로 한 약속에 늦으면 기분 좋은 생일날을 핀잔 들으며 시작하게 될 테고 아오미네는 그것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미리 맞춰둔 폰 알람소리에 깨서 멍하니 눈만 뜨고 있다 갑자기, 어차피 좀 더 누워있다 움직일 건데 이럴 게 아니라 타카오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생각이 들었다. 폰을 얼굴 위로 들어올려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본다. 생일이라고 말하는 것까진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다음엔? 테츠랑 카가미랑 키세랑 놀러 갈 건데 카즈도 올래? 아무리 친화력 좋은 타카오라지만 아오미네 다이키의 생일날, 그 세 명 사이에 껴있다간 어색해서 몸 둘 바를 모를 것이다. 게다가 다섯 명이라면 짝도 맞지 않는다. 미도리마와 함께 불러낸다면 문제가 해결된다마는 이번엔 반대로 아오미네로부터 미도리마에게 연락하기가 또 좀 어색했다. 모모이를 통하거나, 미도리마에게 무슨 일이 있다거나 하는 경우라면 괜찮아도 지금 일이 있는 측은 아오미네다. 두어가지 선택사항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며 버튼을 엄지로 문지르기를 32초, 그는 결국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닫아버리고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쿠로코가 늦지 말라고 제대로 깨어있는가 확인 전화를 한 때가 그로부터 3분 쯤 뒤.
“…듣고보니 그것도 그러네, 고민된다. 아무리 나라도 거기 끼긴 좀.”
「거봐.」
“그래도 아침에 전화했으면 뭐라도”
「그게 별로라니까.」
“음…”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내자 저편의 아오미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부ㄷ」
“아니거든? 저기요 카즈는 좋아하는 애한텐 뭐든지 다해주고 싶은 계열이거든?? 난 지금 다이쨩 생일을 이러고 그냥 넘어가는 게 되게 수치스럽거든???”
담이라는 음절을 완성하기도 전에 바락 쏟아진 말에 당황한 듯 아오미네가 얌전히 입을 다문다. 곧 전화통화로는 소리만이 전해지는 걸 떠올렸던지 그는 어, 음. 하고 잠시 더듬거린 뒤
「미안. 나도 좋아해.」
하고 카운터를 날렸다. 아무래도 그를 당황시킨 말은‘좋아하는 애’쪽인 모양이다. 비슷한 정도로 당황한 타카오도 자신이 뭘 하고 있었던가 되돌이키며 다시 상체를 일으켜 침대 위에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4월 초부터 알고 있던 사실인데 8월 마지막 날에 들어도 여전히, 낯간지럽고, 그리고 듣기 좋은 말이었다.
“…어…응. …아아무튼, 나 없이도 얼마나 재밌게 놀았나 가르쳐줘. 나까지 동원 안 돼도 좋은 날이었던 거 알고 기분 풀리게. 음. 그래서 쿠로코랑 카가미랑 키세랑 만나서 뭐 하고 놀았어?”
「만나서 농구하고 밥 먹었는데.」
“아, 역시!”
그럴 줄 알았다고 소리치자, 자기 생각에도 웃긴지 휴대폰 너머로 아오미네가 낄낄 웃는다.
7분 늦은 키세를 도쿄 거주자 셋이 돌아가며 갈군 결과 뽑아낸 음료 캔을 하나씩 들고 4명의 농구바보는 가까이있는 길거리 농구장에 자리 잡았다. 방금 삥 뜯긴 것 쯤 중학교 때 비하면 댈 것도 아니라는 듯 금세 기운을 차린 모델이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 속에서 선물상자를 하나 꺼냈다. 받아드니 익숙한 크기에 익숙한 무게다. 이게 뭐냐고 촌스럽게 묻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신는 농구화가 자기 취향과는 동떨어진 디자인임을 아는 아오미네가 말없이 시선을 보내자 자기 생일인 듯 신이 난 모델이 재촉을 했다.
“빨리 열어보십셔 아오미넷치! 나 잘 골랐는데.”
“아…뭐 이미 있는 거면 그거부터 신으면 되니까.”
“아이 뭠까, 키세 료타의 안목을 좀 믿으라구요.”
“맞다, 아오미네 오늘 생일이랬지? 생일 축하한다.”
소박한 생일선물 증정식에 별 관심 없이 옆 벤치에 앉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던 카가미가 대수롭지 않게 축하를 건넸다. 카가미의 존재를 쿠로코가 제공하는 생일축하 서비스 정도로 인식하던 아오미네도 그에게 그 이상의 뭔가를 바라진 않았다.
“영어로도 해봐.”
“Happy birthday to you?"
“새끼 발음은 좋다니, 어 씨발 잠깐 이게 뭐야, 야 키세 너…!”
“짝퉁인가요?”
“쿠로콧치 넘함다!!”
“아니 시합 끝나고 가게 가니까 다 나가고 딴 색만 있던 거.”
“맘에 듬까?”
“어 완전. 이거 진짜 갖고 싶었는데 고맙다.”
“아자!!!!”
“누가 보면 복권 당첨된 줄 알겠네…”
“5000엔짜리 당첨보다야 당근 이게 더 어렵죠! 아, 어제그제 부원들한테 죄 수소문해서 찾아다닌 보람이 있슴다~”
“생각보다 공들였네요. 참 아오미네군, 이건 제 선물입니다.”
“오.”
방금 받은 농구화를 신어보는 아오미네에게 다가간 쿠로코가 자기 가방에서 작은 인형 열쇠고리를 꺼냈다. 신발 상자를 야무지게 선물포장까지 해서 들고 온 키세와는 반대로 오락실에서 갓 뽑아왔다고 강렬하게 어필하듯이 알맹이만 달랑이었다. 옆에 앉아 쿠로콧치는 공을 너무 안 들인 거 아님까…? 하고 중얼거리는 모델을 무릎으로 툭 쳐서 입을 다물린 아오미네가 신발 끈을 묶던 손을 들어 열쇠고리를 건네받았다.
“그냥 열쇠고리냐? 나더러 이런 거 달고 다니라고?”
“설마요, 인형 눌러보세요.”
인형에서 흘러나오는 깜찍발랄한 음악은 열쇠고리를 들여다보는 커다란 남고생 약 두 명을 당황시키기엔 충분했다. 묵묵히 너구리를 내려다보는 당사자 대신 키세가 애매한 표정으로 웃으며 쿠로코를 부르자, 어딘지 모르게 의기양양한 표정의 그가 부연설명을 한다.
“이제 해도 점점 짧아질 텐데, 아오미네군 밤길 다니다 여성분들에게 위기감을 주지 않도록 울리면서 다니 농담입니다, 농담 아야야야. 아파요 아오미네군.”
침묵을 유지하는 아오미네의 손이 뻗어와 색이 옅은 머리를 꾹 내리누르는 즉시 항복선언이 터져 나왔다. 잠깐 더 머리를 쥐고 있다 한숨 쉬면서 손을 놓은 아오미네가 자기 가방끈에 간단히 열쇠고리를 건다. 반대쪽 끈을 마저 묶으며 너 진짜 농담이 구려…하고 한탄하자 쿠로코가 자기머리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그러니까 자꾸 연습해야죠. 좀 참으세요.”
“그 당당한 구석이 쿠로콧치답다면 답슴다…아 다 됐어요? 어때요 잘 맞슴까? 사이즈야 맞을 텐데.”
“어 딱 맞아. 가볍고…하하, 진짜 좋은데.”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거나 발을 굴러보곤 극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곱게 농구화를 벗어 다시 신발상자에 넣은 아오미네가 운동화에 발을 넣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가미는?
“자판기 앞에 있네요. 자, 여기.”
“어라, 레그슬리브?”
“아뇨, 팔에요. 필요할 때 쓰면 좋을 겁니다.”
“…땡큐.”
짐작 가는 구석이 있어 얌전히 받아드는 아오미네의 옆에서 키세가 방글방글 웃는다.
“쿠로콧치 친절하네요, 저도 레그슬리브 받았슴다!”
“한 세트 아닙니다.”
“…아, 옙…?? 하아…?”
“즐기는 건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드리는 겁니다, 두 분. ”
“쿠로코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야, 아오미네.”
“오.”
“생일 선물.”
“야 씨 이거 지 생일 때 내가 사준 거랑 똑같은 거네.”
“내년부턴 안주고 안 받기로 하든가.”
“정 없는 놈, 개인주의, 귀국자녀~”
“귀국자녀인거랑 뭔 상관이야! 이 자식, 싸움거냐??”
포카리 340ml 캔 하나로 순식간에 싸우기 시작하는 둘을 보고 어깨를 으쓱한 키세와 한숨 쉰 쿠로코는 조용히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15분쯤 뒤 아까 카가미가 건넨 포카리로 목을 축이며 아오미네는, 카즈도 이런 가벼운 거 줄 거 같으면 연락해도 되는데…. 생각하고 조금 아쉬워졌다. 자기 생일에 대한 타카오의 반응은 카가미보다는 키세의 그것에 한없이 근접할 것이다.
“누구랑 태그 짰어? 쿠로코? 키세?”
「키세.」
“승률은?”
「당연히 이 몸 완승.」
“무슨wwwww자기 혼자 상대한 듯이wwwww말을 하네wwwww점심은 뭐 먹었어? 내기했어?"
「아니 내기는 안 했어. 마지버거 가까워서 거기서 콤보 시켜먹었지. 아 카가미는 주문 따로 하고. 치즈버거 삼십개.」
“배 터지겠wwwwwwww"
「안 터지더라고. 그리고 후배들 놀러 온대서 집에 오면서 주스 사고.」
“농구부 후배?”
「응.」
“무슨 일로? 생일이라서?”
「응…아마? 겸사겸사?」
하루 전에 전화를 걸어왔던 쿠로코와 달리 후배들은 1주일 전에 아오미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문 약속을 잡았다. 사쿠라이라도 보고 배웠는지 주저하는 태도로 그날 생일이신데, 괜찮으시면,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놈들한테 별달리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라 건성으로 뭐 그러던가, 대접받을 기대는 말고. 하고 대꾸했더니 미니게임에서 득점에 성공이라도 한 듯이 기뻐하던 게 좀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연습이 끝난 후 모모이와 함께 집에 가며 걔들 우리 집에서 보물찾기라도 하려고 그러나? 물었다가 다이쨩이 연습 꼬박꼬박 안 나오니까 그렇지! 하고 괜히 팔을 찰싹 얻어맞은 게 황당하고 얄미워 그 후로 연습은 나가지 않았다. 그의 불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후배들은 점심 때 즈음해서 정말로 공손한 태도로 벌벌 떨며 폐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찾아뵐게요ㅠㅠ 로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전화를 걸어왔다. 현명한 일이었다. 연락이 없었더라면 아오미네는 후배들이 놀러 오기로 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가 모모이의 노성을 들으며 허둥지둥 귀가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침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녀석들과 정신없이 경쟁하다 보니 그만 깜빡했더랬다. 그 사실에 조금 죄책감을 느껴 주스를 두어 통 산 아오미네가 집에 도착한 건 후배놈들이 이미 모모이와 같이 들어와 거실에 자리 잡은 뒤였다. 한가운데에 작은 케이크가 초까지 다 꽂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사내놈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생일 축하합니다!! 선배!!!! 라고 고막을 울리는 통에 아오미네도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뭐야? 니들 내 생일은 어떻게 알았는데.”
“모모이 선배한테 물어봐서…”
“선배! 여기 생일 선물요, 시합용 양말!”
“오, 땡큐.”
“야 촛불 끄기도 전에 주면 어떡해!”
“켜지도 않았잖냐.”
피식피식 웃으며 성냥을 집어 든 아오미네가 자기 생일 케이크에 손수 불을 붙이는 동안 모모이가 컵에 주스를 따르고 빵칼을 집어 들었다. 요리가 아니니 그 정도는 맡겨도 될 거라 판단한 아오미네가 상석에 앉고, 1학년 SF가 구색 맞추기나마 거실의 불을 껐다. 여름 해가 아직 쨍하게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거실에서 죄 한 덩치 하는 토오학원 농구부 1학년들과 2학년 에이스, 2학년 매니저가 함께 손뼉을 쳐가며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옆집에서 들으면 괴이하게 여길 일이고, 다행히도 옆집은 매니저네 집이므로 오늘이 아오미네의 생일인 것도 1학년 후배들 중 많은 수가 단순한 남자애들답게 에이스를 동경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후배들은 공평하게 자른 케이크를 한 조각씩 먹으며 인터하이 마지막 시합에 대해 굵직한 목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한두 마디씩 거드는 아오미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르는 즐거운 시합이었다.
“참 아오미네 선배, 저 슛 하는 거 가르쳐 주시면 안돼요?”
“나 가르치는 거 하나도 못하는데.”
“그, 그래도!”
“귀찮아~”
“다이쨩!”
“아 때리지 마 쫌! 애초에 가르쳐서 될 거 같았으면 일찌감치 키세 가르쳐서 그놈이랑 놀지 내가 그렇게 빈둥댔겠냐?”
“빈둥거리는 거 지금도 마찬가지잖아! 정말, 후배들이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데 연습 좀 다 나오란 말야.”
그 말에 후배들이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한 건 사실이긴 한데 이렇게 대놓고 적나라하게 말해버리면 좀 입장이 난감하지만 그래도 역시 속 시원하게 말해줘서 고맙다는 복잡한 얼굴들에 아오미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그렇지만 한동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다수의 동경이 이렇게 명확한 형태로 눈앞에 나타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뒷목을 두어 번 긁고 조금 남은 케이크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어 우물거린 후, 조금 머쓱한 목소리로 뭐, 이제 슬슬 1학년들도 쓸 만해졌을 거고…연계도 손발이 맞아야 하는 거니까…하고 중얼거리자 칙칙하던 얼굴들이 확 핀다. 어째 익숙한 광경이었다.
“다이쨩, 인기만발이네~”
「남자놈들한테 좋아해요! 형아아아아악! 소리 들어봐야 하나도 안 좋다고.」
“에이 수줍어하긴.”
「수줍긴 개뿔이. 아 넌 예외지만…아무튼…그랬다고.」
“오호오. 그래서 얘기하다가 애들 보냈어?”
「어. 케잌 다 먹고 주스도 다 처먹고. 이따만한 어깨들이 현관에 가득 차 가지고 내일 뵙겠습니다 하는데, 와씨 보통 사람들 보면 지리겠더라.」
“다이wwwww쨩wwwwwwwwwwwww”
「뭐. 그 다음엔...부모님 오기 전에 사츠키랑 나가서 케잌 사오고.」
“어라 또?”
「가족들이랑도 생일 축하합니다 해야지. 이건 많이 안 먹었지만…동네 빵집가서 체리 포레누아 사왔어.」
“체리 포레누?”
「그…초코빵에 생크림 많이 샌드하고. 겉에 꽃잎모양 초콜렛 뿌리고 생크림에 체리나 거봉 얹은 시꺼먼 거.」
“으응…아는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 다이쨩 케이크 잘 아네…?”
「그런 건 아니고 사츠키가 그거 제일 좋아하거든.」
“그렇구나.”
「부모님이랑 아줌마…사츠키네 부모님이랑 다 모여서 저녁 먹고 케잌 잘라먹고 선물 받은 다음 씻고 누웠다가, 내일 학교에 새 신발 가져갈까 하다가…너 보고 싶어져서.」
“…으응.”
「그래서 전화했어.」
그 말에 타카오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이마를 긁적였다. 말을 죽 시키다 보면 솔직해질 거라 생각하고 하루 종일 뭐했는가를 물어보긴 했는데, 실제로 아오미네의 속마음을 들으면 그는 언제나 이런…조금은 몸 둘 바를 모르겠고, 또 조금은 심장께가 근질근질해서 당장 아무라도 붙잡고 자랑이 하고 싶은 기분이 들고는 한다. 덩달아 아직 생일인 토오의 에이스를 만나고 싶어져 발목을 긁적거리다 불쑥 말했다.
“그럼 우리 잠깐 볼까? 자전거 타고 가면”
「너 그거 타고 나오게?」
“아아니wwwwwwww그거 말고wwwwwww동생꺼 빌려서wwwwwwww”
자전거란 말에 뒤에 딸린 리어카를 생각했는지 놀라서 물어오는 아오미네가 어떤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을지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웃으며 15분쯤이면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 슬쩍 타진하자 곧장, 아오미네 다이키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로, 빨리 나와,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럼 놀이터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고, 잠옷으로 쓰는 고무줄 반바지를 갈아입으면서 옆방의 여동생을 소리쳐 부르는 잠깐 사이 순식간에 타카오는 맘이 급해졌다.
“왜 오라방구.”
“이쁜 동생님, 자전거 좀 빌려주라.”
“어디 가게?”
“어 요 앞에.”
“자전거 타고 요 앞에? 멀기도 하네 요 앞.”
“엄마한테도 말해야 되니까 그 사이 열쇠 좀.”
“그래.”
“땡큐, 내일 푸딩 사올게."
타카오 부인은 이 늦은 시간 그것도 방학 마지막 날에 외출 좀 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행선지도 묻지않고 흔쾌히 승낙하더니 올 때 두부 좀 사오라고 심부름까지 시켰다. 처음부터 허락을 못 받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새삼 자기 가족이 굉장히 자유분방한 편이라고 재인식하며 타카오는 여동생의 자전거 자물쇠를 풀고 집 앞 도로까지 끌고나왔다. 그가 리어카를 뒤에 달고다니는 자전거보다는 바퀴가 작아 속도가 좀 덜 난다만 그의 자전거는 리어카와 함께 미도리마네 집에 주차되어 있고, 걸어서 가다간 길 위에서 9월을 맞이하고 말 것이다. 카드가 든 지갑이 덜 거슬리도록 호주머니 안에서 위치를 조금 조정하고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은 뒤 출발하려다 다시 오른발을 땅에 딛는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끄집어내 최근 착신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못 와?」
“아아니, 혹~시 날짜 바뀌기 전에 못 만나면 안 되니까 미리 말해두려고.”
「뭘?」
“생일 축하해, 다이쨩.”
「…어. 그래 고마워.」
다시 전화를 건 보람이 있다. 단번에 기분 좋아진 티가 너무나 순진하게 나버리는 목소리에 타카오도 그와 함께 만족했다. 히죽대며 전화를 끊고는 페달을 밟아 나아간다. 작은 휘파람 소리가 밤공기 속을 흘렀다.
누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한 듯 반짝 눈이 떠졌다. 이르게 밝아오는 하늘로 시간을 어림짐작해보며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씻고 나올 때엔 정신도 맑아진 상태였다. 젖은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채 반바지를 덜 짧은 반바지로 갈아입고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도 어제 빨아 말려둔 트레이닝복으로 바꿔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마지막으로 탈탈 털어 말리면 나갈 준비 끝.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핸드폰의 통화이력을 띄워서 본다. 23시 32분, 타카오 카즈나리. 아직 자는 중인지 기척이 없는 부모님 침실 앞을 조용조용 지나 소리 나지 않도록 현관을 나온 뒤 아오미네는 가벼운 스트레칭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 번씩 했다. 아직까지도 멍해있던 몸의 모든 부분이 깨어나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 강변까지, 워밍업 삼을 요량으로 천천히 달린다. 발목, 종아리, 이상 무. 무릎을 조금 더 높이 들면 허벅지의 근육도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팔과 상체의 움직임을 더 크게 하려면 달리는 속도도 더 빨라야 하니까 강변에 도착한 뒤로 미룬다. 유연하게,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어제처럼 오늘도 완벽하게 가동한다. 아오미네 다이키에게 있어 당연하고 가장 익숙한 상태다. 이유도 없는데 하려고 마음먹기가 귀찮을 뿐이지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는 즐거웠다. 작년과, 재작년. 도합 2년을 대체 어떻게 그렇게 안 움직이고 살 수 있었지, 생각이 들 정도다. 시원한 아침 공기가 가슴 속을 씻어내고 운동에 맞추어 심폐도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하면 이제 그 페이스를 유지하며 쭉쭉 달리기만 하면 된다. 계속되는 운동에 몸이 익숙해져 의식하지 않아도 무릎이 같은 높이를 유지하며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오고 뒤로 밀려난다. 이 때 즈음, 슬슬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조깅하고 아침은 뭐 먹지, 혹은 오늘 1교시는 뭐더라, 또는 용돈 아빠한테 달라고 할까, 그도 아니면 신설 스포츠용품점 개점할인행사 며칠까지더라 등등. 다시 말해 평범한 고등학생의 사소한 일상에 관한 별 대단치 않은 잡상이다. 그리고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날 좋아한대!!!
속력을 유지한 채 고수부지로 향하는 계단을 순식간에 내려갔다. 둘, 셋, 둘 셋 다섯. 뛰어내린 기세를 살려 홱 몸을 돌리고, 팔꿈치를 좀 더 높이까지 올리며 달리기 시작한다. 지나가는 주변 경치가 속도를 대뜸 올렸다. 피가 팔다리를 돌며 열을 냈지만 아직 땀은 나지 않는다. 하늘이 확연하게 밝아졌어도 공기는 한참 서늘했다. 좋아하는 애라고 카즈가 말했어! 움직여서인지 어제의 대화 때문인지, 숨이 찬 건지 설레서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애매한 정도로 가슴이 뛴다.
타카오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아오미네가 반한 상대가 좋아하지도 않는 시커먼 남자놈한테 이렇게까지 어울려주는 사람이라면 그거야말로 큰일이다. 아오미네는 타카오를 좋아하고, 타카오도 아오미네를 좋아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이 친구였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순조로운 연애였다. 굳이 그 애정을 증명할 필요는 아무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곤 해도, 타카오는 좋아하는 게 유달리 많았다. 카드 게임 좋아하고, 오락실도 좋아하고, 노래방도 좋아하고, 매운 것도 좋아하고, 개그도 좋아하고 농구부 선후배도 좋아하고 농구도 좋아했다. 비록 좋아한다고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그냥 보면 알 수 있었다. 티가 확 나고 타카오도 숨기려하지 않았다. 아오미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한다는 티가 나니까 그냥 보고 알았다. 굳이 말로 한 적은 없지만 그냥, 보고 알았다. 그걸로도 아오미네는 충분히 좋았는데, 어제, 그러니까 8월 31날 밤, 다시 말해 생일 마지막으로, 타카오는 그를 가리켜 ‘좋아하는 애’라고 지칭했다. 얼마나 좋았냐면, 오늘 아침 일어나서 머리가 할 일이 없어지자마자 제일 먼저 생각날 정도로 좋았다. 아오미네 스스로도 신기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직접 말로 듣는 게 처음이라고 해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 이렇게까지 기쁠 수도 있는 거였나? 그런데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좋았냐면, 아오미네는 어느새 강변의 산책로를 있는 힘껏 달리고 있었다. 고교 최속의 전력질주였다. 아침 조깅을 시작하면서 얼굴을 익힌 젊은 여자가 아까 놀란 얼굴로 돌아봤던 것 같다. 자기 얼굴이 웃고 있는 걸 의식한 순간, 다음으로는 힘껏 환호성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충동이 번뜩였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다 끌어 모아서 이 신나는 기분을 표현하고 싶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봤던 드라마 한 장면처럼 촌스럽게.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거구나. 중학생 땐 경기에 이기거나 고작 선배를 한 명 제친 정도로도 어린애처럼 신이 났지만, 내가 뭘 해낸 것도 아니고 남 때문에 이렇게, 자고 일어나서까지 신날 수 있는 거라니 전혀 몰랐다. 페이스를 늦추는 게 너무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신나게 반환점의 나무까지 가서 이 속력으로 돌아오고 싶지만 그러면 아침부터 너무 힘을 빼버린다. 개학식 날이어도 농구부는 뭔가 할테고, 간만에 보는 얼굴들과 미니게임 한 판 뛰어줄 마음도 있으니 적당히 해둬야지. 조금씩 속도를 늦추니 고동도 시간을 들여 얌전해졌다. 계획 이상으로 움직여버린 몸이 기분 좋게 덥다. 아오미네는 여기까지, 라고 정해놓은 코스 끝의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서 멈췄다. 집을 나설 때 했던 것보다 공을 들여 스트레칭을 하고, 잠시 티를 펄럭여서 옷 속의 열도 빼내고, 적당히 몸이 식었을 때 다시 걷기 시작한다. 몸이 더 식으면 뛰기 시작해서, 그래도 평소보다는 조금 이르게 집에 도착할 테지만 그래도 부모님은 이미 일어나 있을 것이다. 아빠한테 용돈 달래야지, 생각하며 내딛는 발에 신발 바닥이 눌렸다가는 다시 가신다. 규칙적이고 기계적이고 적절한 강도의 운동에 딱 좋게 취한 몸이 의식하지 않아도 스스로 운동했다. 조절할 필요가 없어지자마자 또 : 날 좋아한대!!!!
자고 일어나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정말이지 방학과 생일날의 끝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마무리였다.
날 좋아한대.
지각하지 않고 제 시간에 얼굴을 내민 아오미네를 본 토오 농구부는 선후배동기소꿉친구를 가리지 않고 거의가 놀란 표정이었다. 그 거의에 포함되지 않는 하라사와 감독은 머리칼을 잠시 매만지며 상황을 지켜보다가, 와카마츠가 에이스에게 말을 걸기 직전 그를 불렀다.
“아오미네군, 잠시 얘기 좀 할까요.”
“예이―”
여전히 공손하다기는 어려운 태도였고, 여전히 감독에게는 그나마 고분고분한 편이었다. 체육관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하라사와는 파워포워드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특유의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전에 말했던 훈련에 참가하겠다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참가고 자시고 나 없으면 의미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거.”
“네, 그렇죠. 패스를 하려해도 적절한 위치에 아군이 없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아오미네 군에 나머지 레귤러를 맞추려는 훈련입니다. 아오미네 군의 기대치를 보고, 거기 부응하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기용할 생각입니다.”
지난 여름 드러난 토오의 약점에 관한 이야기였다. 무슨 변덕인지 연습에 참가하고 팀의 다른 선수들과의 협공이란 것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보이게 된 아오미네였으나 성과는 극히 미미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아오미네가 자기가 공을 옮기기보다는 다른 녀석에게 넘기는 쪽이 낫겠다고 판단했을 때, 정작 그 사람이 패스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전의 아오미네에게 패스라는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오는 패스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도 변명거리의 일각을 차지했으나 하루 만에 그 효과를 상실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부원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받기가 십상이다. 가장 큰 원인을 따지자면, 기적의 세대 에이스가 지금의 팀에 가지는 기대치가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마크가 아직 붙어있거나 스크린 요원이 근처에 있어도 스틸을 막고 안정적으로 받아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정도는 당연히 하지?’ 라고 몸으로 외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큰 실수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오미네는 그걸 왜 제대로 못 받는지, 다른 부원들은 왜 그 대목에서 패스를 하는지 서로 이해하지 못해 분위기가 이상해지곤 했다.
하라사와는 인터하이 토너먼트 전에서 탈락한 직후 에이스를 불러다 그거, 고칩시다. 하고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아오미네가 뭔 소립니까? 되묻지 않고 불만스런 표정으로 침묵한 것은 그 역시도 바로 그 점을 문제로 인식했다는 증거였다. 8월 초에 인터하이의 결과가 나온 뒤 즉시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정작 본인이 안 내키는 기색으로 여전히 꼬박꼬박 일주일에 한 번은 연습을 빠지는 것을 본 감독은 무기한 연기를 선언했다. 정말 그래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는 매니저에게 어깨를 한 번 으쓱인 감독이 준 대답은 조금만 더 방임주의로 가보죠. 였다. 한 달 후에 골칫덩이 에이스가 빠지던 하루를 자진해서 마저 나오게 된 것을 본 모모이는 감독은 알고 자신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우연이었던 건지를 의아해했다. 하지만 감독에게 직접 물어봐도 어른이니까요, 운운하며 대답을 회피할 것 같았다. 여자의 감이다.
“다른 기적의 세대는 이미 작년부터 시작했을 겁니다. 팀을 그들에게 맞추는 작업 말입니다. 우리는 꽤 늦어졌습니다만, 그렇다고 아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요. 모처럼 아오미네 군도 의욕을 내줬고.”
“아, 예.”
“관심이 별로 없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정말 숨길 생각도 없군요. 하지만 정작 훈련에 대해서도 더 말할 건 없어서 말입니다. 기왕 하는 거 좀 참고, 선배는 이미 늦었다 쳐도 후배들하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정도 밖에는…?”
“여기가 무슨 애들 놀이텁니까 감독님이 사이좋게 지내렴~ 하게. 뭐, 말씀대로 기왕 하기로 한 거, 어차피 제 머리론 다른 방법 떠오르지도 않으니까.”
말은 이렇게 믿어봐도 될 것처럼 여유롭게 해놓고, 그는 당장 첫날부터 와카마츠와 싸웠다. 미니게임을 실시하되 아오미네는 득점하지 말 것, 훈련의 알파이자 오메가였고 감독과 매니저와 에이스 본인이 예상한 대로 아오미네는 답답해 죽으려고 했다. 자기 손으로 골을 넣지 못하면 어시스트 밖에는 할 게 없는데, 패스를 해줬더니 펌블이 나고 엘리웁은 타이밍이 어긋나 아슬아슬하게 겨우 들어가니 DF불가능의 스코어러로서는 분통이 터질 법도 했다. 반대로 와카마츠의 입장에서는 공을 올려주는 쪽이 타이밍을 맞춰야 맞는 거니 엘리웁 건은 논의할 가치가 없고, 패스하기 전에 아이컨택도 없이 냅다 폼리스슛하듯이 던지면 이게 받으라고 던지는 건지 머리를 맞추려고 던지는 건지 구분이 가겠냐는 것이다. 캡틴이 변호를 해준 게 고맙기는 한데 그 변호가 너무 꼬투리잡기라 송구해서 어쩔 줄 모르며 사쿠라이가 몸을 접었다가는 펴고 다시 접었다가 또 폈다. 캡틴과 에이스가 멱살을 잡았을 때 그는 자신의 사죄가 부족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죽고 싶어했지만, 1학년의 눈으로 봐도 센터와 파워포워드는 그가 발가벗고 옥상으로 달려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 이상 시비가 붙었을 것 같았다. 너무 빠르다는 캡틴과, 얼마나 빨라야 되는지 알려고 이거 하는 거라는 에이스의 말이 둘 다 맞았다. 감독도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어려웠던지, 혹은 그런 방침인 건지 두 건장한 선수들이 살기등등할 때까지 내버려뒀다가 한 마디로 상황을 잠재웠다. 모모이는 작년에는 캡틴이 먼저 나서서 원만하게 사태를 수습하는 사람이어서 감독님이 여태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닐까, 혼자 짐작해보았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주먹질을 할 게 아니라면 그만하죠.”
“…젠장!”
“망할, 누군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아나….”
연습요일이 바뀌어서 이젠 한 번 밖에 못 만난다는 말에 타카오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을 마주하는 게 아니라 옆으로 시선을 비켜 딴청을 피우는 걸 보니 완전히 참말은 아니겠구나 생각도 했다. 잊을 만하면 한숨을 쉬어대는 아오미네를 보고 있자니 얘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앉아있는 게 데이트에 해당한다는 자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내가 쉬워진 건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타카오 카즈나리이기 때문에, 훨씬 익살스런 언어로 표현한다.
“다이쨩, 나한테 집중이 안 돼?”
“뭐? 아냐, 그런 게 아니고 연습이 답답해서….”
“연습이?”
“엉.”
“호오. 무슨 일인지 들어주고 싶은데 나는 다른 팀이라~아쉽네!”
“엄청 듣고 싶다는 얼굴이거든?”
“어라, 들켰당.”
뻔뻔하게 하는 대답에 겨우 아오미네가 피식 웃었다. 무슨 연습인지 궁금하긴 해도 농구시합은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하게 룰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활동해서 이기고 싶었다. 물론 데이트 중의 정보수집은 룰 위반이 아니지마는. 손가락을 세워 이마를 긁적거린 파워포워드는 영 어색한 표정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연습이란 게 본래 이렇게…싫은 거였나, 싶은 게.”
“음? 그럼 여태까지는 완전 신났어?”
“어…연습하면 더 잘하게 되니까, 음. 옛날엔 재밌었지.”
연습하면 당연히 더 잘 하게 되는 거라는 인식이 바닥에 깔려있다. 실물을 육안으로 지근거리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로 이런 놈들이 있구나, 우와. 세상 참 불공평하네. 가 타카오의 감상이었다. 뭐라 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이는데도 불평이 계속 나오는 것이, 평소 아오미네가 그리 수다스러운 편이 아닌 걸 감안하면 쌓인 게 꽤 많은 모양이었다.
“옛날엔 그냥 재밌으니까 했는데, 요즘은 재미없어도 해야 되니까…. …?”
“응?”
“…본래 이런 건가?”
“응. 본래 그렇지 보통은.”
“허, 그랬구만.”
그런 당연한 사실을 무슨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이 그렇구나…. 하고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천재를 앞에 두고 타카오도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사실을 하나 새로 배웠다. 세상에는 연습하면 늘, 당연히 더 잘하게 되는 재능도 존재한다. 그게 바로 맞은편에서 콜라를 휘적거리고 있는 이 고등학생이고. 잊을 만하면 때를 놓치지 않고 일깨워주는데, 같은 종목을 플레이하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타카오는 연인이 190대 중반의 시컴둥이여도 얼마든지 귀여워할 수 있다. 하지만 경쟁팀의 에이스는 약점을 찾아내려는 집요한 눈길로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 부분의 조절을 나름 잘 해오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 자꾸 혼선이 생기는 것 같았다. 원인은 아마 화제로 농구가 등판해서다. 서로 탐색전이 다 끝나 꽤 익숙해진 상태에, 둘 다 제일 좋아하고 일과의 많은 부분을 투자하는 스포츠인 농구 얘기가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타카오는 피클을 포크로 콕 찍어 입에 넣으며 어디로 얘기를 돌릴까 궁리했다. 모모이랑 쿠로코는 요즘 좀 어때? 으음, 애가 다른 의미로 풀이 죽을 것 같으니 기각.
“카즈 너도 그래?”
“연습? 뭐, 그렇지. 이기고 싶으니까 하는 거지 솔직히 연습 자체는…응, 크게 즐거울 거 없지. 사람들하고 친해지기는 하는데, 너무 재밌게 노닥거리면 또 제대로 연습이 안 되고.”
“그렇구나….”
그의 대답을 들은 아오미네는 의외라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다른 사람들도 농구가 그냥 막 대책없이 재밌기만 해서 하는 줄 아는 건 아니겠지? 차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아 타카오는 그냥 갈릭 소스를 포크로 찍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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