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를 스무 번은 지웠다가 다시 넣은 것 같다. 그렇게 소란을 떨어놓고,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게 없는데 전과 똑같은 식으로 연락하려니 스스로도 좀 갑갑하다. 그렇지만 아오미네를 그의 말대로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 타카오에게 그건 그를 혼자 내버려두는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 소식도 없이,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을까 오로지 상상만 하면서 기약도 없이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니 아오미네는 괜찮을지 몰라도 타카오가 안 괜찮았다. 애초에 타카오는 문제가 있을 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생각을 정리하기보다는 여러 사람 만나가며 얘기하고 얘기를 듣다 방법을 찾아내는 타입이었다. 아오미네가 딱히 문제가 되는 언동을 보이지 않아도, 그냥 아오미네 다이키로 있는 것만으로 그를 왜소하게 만드는 거라면 한 사람이라도 덜 서러운 편이 낫다고 타카오는 생각했다. 아오미네와는 정반대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좋아만 하고 싶었다. 미움까지 더할 필요는 없다. 좋아하기만으로도 벅찬 지금 그 외는 필요 없었다.
[♡]
이런 답장을 보내오는 남자를 대하는데 애정보다 더 마땅한 것을 타카오는 모른다.
“야, 너는 술을 들고 오려면 안주거리도 좀 사오든가 하지 어떻게 이렇게 경우가 없냐!” “니 밥통이 아~뭐가 들어왔네~하게 채우려면 마트 가야 돼, 새끼 공짜술을 줘도 난리야.” “말이나 이쁘게 좀 하면…미트볼 데워올테니까 기다려!”
카가미가 기다리라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관습적인 표현이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안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기세좋게 걷어찰 것이 틀림없었다. 아오미네는 쫄래쫄래 집주인의 뒤를 따라 부엌에 가서 잔을 들고 나왔다. 이거면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맥주는 미리 따두면 김이 다 날아가버리니까 그대로 두고 TV채널이나 돌리면서 기다린다. 결국 멈추는 채널은 동물 다큐멘터리였다. 다 알아듣지 못해도 화면을 보면 대충 무슨 내용인 줄은 아니까. 곧 카가미가 울긋불긋하게 야채를 새로 썰어넣은 미트볼을 내왔다.
“그래, 뭔 일이야?” “우리 사이에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고 가고 그러냐?” “나가시죠.” “거 새끼 야박하긴.”
투덜거리며 아오미네가 맥주를 잔에 부었다. 거품이 넘치지 않도록 절묘한 선에서 멈추고 병에 남은 나머지는 제 입을 가져간다.
“되게 친한 사람이 있다고 쳐.” “어.” “근데 걔가 나 잘난 게 질투나고 그런 자기가 너무너무 싫대. 그래도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 너 같으면 어떻게 하겠냐?” “누구 얘기야?” “있어, 묻지 마.” “흠. 비슷한 상황에 처해본 사람으로서 조언하자면, 일부러 져주거나 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마라. 그 순간 너는 개x발 x되는 거야.” “…너 언제부터 이렇게 입이 더러웠더라?” “너한테 옮았지 새꺄!” “어째 테츠가 쪼더라.”
졸업 직후 건너간 미합중국에서 아오미네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복잡한 계약이네 비자네 하는 문제는 딱 귀까지만 도달하고 그 이상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가 할 일은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운동해서 신나게 농구하는 것이다. ‘신나게’ 할 수 있는 환경인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온 실력을 발휘해도 거기에 맞춰 끈질기게 대항하는 적수뿐이다. 사생활에 있어서도 완벽했다. 집 근처에는 늘 사람이 모이는 길거리 농구장이 세 군데나 있고, 걸어서 15분이면 카가미네 집의 초인종에 손이 닿았다. 아직은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 없어 프로란 걸 들키지 않고 지칠 때까지 플레이 할 수가 있다. 밝은 조명과 잘 닦인 코트, 관객들의 커다란 함성이 없는 대신 새가 울고 개가 짖고, 바퀴를 멈추고 지켜보던 차의 클랙션, 휘파람, 박수갈채가 있었다. 당돌하게 덤비는 꼬마를 한껏 놀리기도 하고, 기분이 내키면 점심까지 사먹여 가며 크로스오버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내킬 때마다 언제든지 원하는 종류의 농구를 할 수 있다. 자유와 기회의 나라인 줄은 잘 모르겠고, 아오미네 다이키를 위해 예비된 약속의 땅 같았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내기에 이긴 대가로 추천받은 음식점에서 메뉴를 하나씩 먹어보다가, 이거 카즈가 좋아하겠다, 생각이 든 순간 그 완벽함은 가장 중요한 게 없는 가짜가 되어버렸다. 원하는 게 있으면 가지면 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줄곧 술술 풀려온 인생에는 어느샌가 관성이 붙어있었고, 그 힘은 아오미네에게 젊은이 특유의 대책 없는 패기로 나타났다. 실패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려는 일은 당연히 성공할 거라 여기는 오만함은 이 천재가 타고난 천성이기도 했다. 난 여기가 좋으니까, 카즈만 좋다면 둘이 여기서 같이 살면 그게 제일 좋겠지? 기껏 초대한 타카오를 고작 집 주변이나 데리고 다닌 건 그래서였다. 여기서 살면 어떨 것 같아? 마음에 들어?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옮길 테니까. 당연히 그가 자신과 함께 할 거라 생각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 혼자 헛물을 실컷 켜고 있던 셈이다. 타카오가 대답하는 대신 반지를 들고 있던 손을 오므렸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아오미네는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참 자기 좋을 대로만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오늘 동아리 술자리겸 동창회 했다www다들 술좀들어가니까 농구로 암수를 가리자고 난리www아니 첨보는 슈토쿠동창회 멤버들한테 승부를 걸다니www미야지(형) 선배 반 가를거냐고wwwww난 미도리마랑 같은 편 안넣어주구www다들 나빴어wwwww] [여긴 아직 밝은데 술꾼이랑 얘길다하네. 해장했어?] [꿀물 타먹고 왔지렁 다이쨩은 머ㅜ해] [개랑 호랑이랑 놀지롱.] [타이가 도망쳐!!!매우 빨리 도망쳐!!!] [걔가 키우는데] [쿠로코가 개무서워한댔는데?!] [그 쿠로코가 하도 개를 들이대서 극복했다고 합니다] [쿠로코…무서운 아이…!]
아오미네는 언제나 위를, 앞을 보고 있었다. 자신과 대등하게 경쟁할 상대를 원했다. 그를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혹은 질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은커녕 인지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랬는데, 이제 아오미네가 부모님도 소꿉친구도 제쳐두고 가장 곁에 두고싶은 한 사람이 그를 버거워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턱이 없다. 자신의 어떤 점이 타카오를 힘들게 만드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걸 묻는 것 자체가 그를 자극할지도 몰랐다. 아오미네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애초에 행동해도 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 채 타카오의 행동을 기다리기로 했다. 해도 괜찮은 것을 일러주고 어떤 점이 문제인지를 알아내어 가르쳐주고 이렇게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이끌어주거나, 혹은 그만하자고 결정하기를 기다리기로. 타카오가 지적한 대로 그에게 전부 떠넘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아오미네는 자신이 보통사람보다 훨씬 쉽게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타카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그 쓸데없이 눈치가 좋은 남자는 오히려 아오미네의 가장 사소한 제스처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반응하니 반대로 보통 사람보다 더 쉽게 아오미네에게 영향을 받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아오미네는 임의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가 해도 된다고 혹은 하라고 알려준 것만 해야지 이 상황은 긍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그야말로 겁쟁이의 행동방식이지만 그렇게 해서 타카오가 괜찮아지고 그래서 같이 있어준다면 그건 성공이다. 그게 바로 성공이다. 그래서 아오미네는 기다렸다.
“여, 시-인쨩!” “타카오.” “의대는 시험이 늦게 끝나네~아이구 얼굴이 반쪽이야!” “그러는 너는 잘 지내는 것 같군.” “응, 이제 알바 안하니까 살판났지.” “성적은?” “그쪽이 관리해준다고 해서 제가 못 받을 장학금을 받게 되고 그런 수준은 아니니 신경 꺼주시기 바랍니다….” “흠.”
나름으로는 대화를 터나갈 가벼운 신변잡기랍시고 고른 주제였던 모양이다. 타카오의 반응을 본 미도리마는 캔단팥죽을 홀짝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인은?” “으음…. 헤어지진 않았는데. 시간을 가지는 중이라고나 할까?” “시간.” “응, 괜찮아질 때까지.” “괜찮아지다니, 뭐가 말이냐.” “…뭐가 됐든.”
그러자 에이스님이 못 마땅한 얼굴로 눈썹을 치켜올렸다. 못 마땅할 것이다, 이런 애매하고 두루뭉실한 미봉책이라니. 하지만 당사자들이 둘 다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뒤에 최후를 맞이하고 싶은 것이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끝까지 노력해보려고. 한심한가?” “남일이라고 함부로 말할 생각은 없다는 거다.” “얼레? 신쨩 나 저번에 징징댔을 때에 비해 무진장 우호적인 태도인거 알아? 이게 또 무슨 심경의 변화람~? 혹시 그 사이 솔로천국에서 벗어나기라도 했어???” “그 녀석은 확실히 무례한 축이다만, 애정은 진심이겠지.” “…으응? 누구 말야?” “네 애인 말이다.” “흐음. 꼭 아는 사이인 것처럼 말하네?” “…아오미네가 웬일로 내게 연락을 하더군. 그리고 모모이와 만났다. 설명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만.” “음…그러니까아….”
이런 상황에서 미도리마 신타로의 한숨은 이쪽을 엄청난 지지리궁상모지리처럼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새로 배운다. 타카오는 계속 시치미를 떼어야 할지, 아니면 이미 늦었으니 배째라는 식으로 나가야 할지 재고 있었다. 캔을 천천히 흔들며 미도리마가 말을 이었다.
“말 해두지만 그 녀석은 수동적이기로는 어디 비교할 데가 없을 정도니 결국 선택은 네가 하게 될 거다.” “오, 딱 맞아. 나 소름 돋았어. 신쨩 아예 이 길로 나가보지 그래?” “닥쳐봐라. 미국에 건너가 있든, 연봉이 300만이든, 그 녀석은 그 녀석이지. 게으르고 제멋대로에 툭하면 응석부리려 드는 점은 한 군데도 변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틀렸나?” “맞는 거 같습니다….” “그럼 결국 네가 그 녀석에게 끌린 요소는 변함없다는 것 아닌가?” “신쨩이 내 안목이 거북이 똥꼬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잘 알겠다…. 300만 달러로는 엄청 많은 걸 할 수 있잖아? 신쨩은 도련님이라 감이 잘 안 오나 본데 엄청난 거라고?” “그 정도 액수가 널 초라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거다.” “…신쨩 데레기?! 데레 그랜드 시즌이 와버린 거야?! 오춘기 대1기가 아니고 데레기야?!” “닥쳐라.”
차갑고 단호한 명령에 타카오는 얌전히 조용해졌다. 가만히 있기는 지루하니까 발을 움직여 천천히 그네를 흔들며 기다린다. 하지만 미도리마는 더 이상 긴 말은 하지 않았다.
“그 300만짜리가 네게 목을 매고 있지.”
타카오는 받아칠 말도, 웃어넘길 기력도 발견하지 못했다. 맞는 말이었다. 아오미네는 타카오와 동거하길 원했고, 타카오가 모르겠다고 하자 그 장밋빛 계획을 기약 없는 나중으로 미뤄버렸고, 자기 말대로 연락하지 않고 그저 순종적으로 기다렸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타카오는 천천히 발로 땅을 밀었다. 그네가 밀려났다가는 다시 앞으로 돌아온다. 고개를 삐뚜름하게 돌려 미도리마와 눈이 마주친 그가 하하, 마른 소리로 웃었다.
아오미네는 자기도 놀랄 정도로 자기 말을 잘 지켰다. 그가 먼저 타카오에게 연락한 것은 귀국 일정을 알리려는 딱 한 번뿐이었다. 이륙 5분 전까지도 ‘마중나올 거야?’라고 묻고싶어 전전긍긍한 주제에 얌전히 핸드폰을 끄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럴 의도가 없었더라도 징징대며 매달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라도 타카오에게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아오미네는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농구선수를 그만둘 수 없고 그렇다고 그와 헤어지기도 싫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조용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싱겁고, 불안하고 괴로운 방법이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오지?마중갈게]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수속을 마치고 꺼내본 핸드폰에 라인이 와있었다. 타카오였다. 바로 보겠다 생각하니 들뜨는 기분과 함께 발걸음도 빨라진다. 요란한 안내 방송이 끊이질 않는다. 시카고 행 비행기가 곧 출발할 것이다. 천장이 높은 복도를 빠르게 지났다. 방송은 이제 미아를 찾고 있었다. 사람들을 이리저리 앞지르면서 아오미네는 힐끔 시계를 확인했다. 비행기는 늦지 않고 예정시간대로 도착했다. 타카오가 오래 기다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보폭을 넓게 유지한 채 성큼성큼 걷다보니 겨우 홀이 나왔다. 마음은 급한데 사람은 북적거리고, 이 속에서 타카오를 알아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아마 타카오가 먼저 이쪽을 발견하겠거니 생각하며 적당한 속도로 인파를 훑어보던 아오미네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느꼈다거나 하는 이유도 없이 그냥 그래야할 것 같은 기분이라 거기 따랐을 뿐이었는데, 자연스레 눈이 멈춘 곳에 바로 찾던 얼굴이 있었다. 주변에서 누굴 찾거나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순간 의식에서 희미하게 사라진다. 몸을 돌리는 사이 그도 아오미네를 알아보고 웃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몰려서 혼잡한데도 그게 잘 보인다. 신기한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집중했으면, 하고 스스로도 조금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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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kdor
아오미네는 저절로 나와버리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타카오는 잠깐 망설였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 아오미네는 그 손에 반지가 있다는 걸, 정확히 왼손 약지에 반지가 있다는 걸, 바로 자기가 준비했던 반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오미네는 타카오가 이제 괜찮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오미네는 타카오에게로 향했다. 아오미네는 타카오가 가지고 있을 반지를 떠올렸다. 아오미네는 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고도 생각했다. 아오미네는 급하게 놓아버린 가방이 다리로 쓰러지는 걸 무시하고 타카오를 포옹했다. 아오미네는 그가 큰 소리로 웃는 것을 들었다. 타카오는 이제 괜찮았다. 아오미네는 앞으로도 그를 좋아해도 괜찮았다.
그 때 일이, 왜 비행기 타기 전도 아니고 세관 검사까지 마치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지금 불쑥 떠오르는지 몰랐다. 타카오는 제대로, 그것도 잘 해냈다. 술자리에 적당한 빈도로 얼굴을 보이고 MT도 어떻게든 시간조정에 성공해 무사히 참석해 대인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면서 목표 금액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모았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푸념을 해 아오미네의 수명을 늘리지도 않았다. 잘못했다간 5년은 더 살만큼의 욕을 그가 알지도 못하는 새에 강제증정 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타카오가 가장 뿌듯해하는 대목도 바로 이 부분이다. 아무리 뿌듯해 해봐야 그 고생을 시킨 장본인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들한테도 자랑을 못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여행가방을 끌고 천천히 걷는데 확실히 큰 사람들이 일본보다 많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아오미네를 찾아낼 수 있었다. 양 소매를 둘둘 말아 올린, 변한 게 없는 차림새였다. 더 마르거나 더 까매진 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영 어림없는 상상이었나 보다. 손을 높이 들어올린 채 다가가자 저쪽에서도 알아보았다. 이리저리 사람 사이를 떠돌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렀을 때, 타카오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그리운 얼굴이 똑같이 웃음으로 답했다. 사정이 생겨 못 가게 되었다고 뒤늦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얄밉고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혔다가 억울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어도 동시에,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이 들끓어서 고민만 계속 했던 거다.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경위가 우습게도 정작 얼굴을 보니까, 고작 얼굴만 봤을 뿐인데도 그냥 좋았다. 그래서 타카오는 자기 생각보다도 상황이 심각한 걸 알았다. 이도저도 아닌 괴로움이 앞으로도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예감인 동시에 유추였다. 아오미네 다이키를 상대로 느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상충하는 감정의 한가운데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카즈!” “다이쨩 오랜만이야~”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아오미네가 팔을 벌려 타카오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사이 미국물이 이렇게 들었나? 남의 눈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서슴없는 스킨쉽에 놀라고 있자니 그 사이 여행가방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NBA리그의 루키가 이끄는 대로 공항을 빠져나와 시가지를 지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주변의 모든 것이, 사람과 말소리와 풍경 전부가 낯설었다. 진짜로 외국에 와있는 거라는 실감이 났다. 처음 접하는 것들로 가득 찬 거리에서 딱 하나 전부터 알던 게 아오미네다. 잘 알고 있는 옆얼굴을 어쩐지 감회에 젖어 바라보고 있자니 시선을 눈치 챈 포워드가 씩 웃어보였다. 괜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다이쨩, 웃음이 늘었네.” “그래?” “응. 전엔 이렇게~ 뭐랄까 음…난 멋있어 왜냐면 멋있으니까, 이러고 의식하면서 딱 무게잡고 있는 느낌이었지.” “…….”
의식하면서 하던 행동들을 간파당한 것이 부끄러운지 조용히 고개를 돌린 아오미네가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낄낄 웃고 난 뒤에, 운전석에서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아오미네의 손과 시트 사이에 살짝 손을 밀어넣는다. 예상한 대로 계속 딴청을 피우면서도 손은 슬며시 잡아오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딴청이 성립되지 않았다. 이런 구석은 그대로구나. 울컥울컥 치솟는 웃음을 다 누르지 못하고 칠칠맞게 흘리고 있자니 결국 아오미네가 한숨을 쉬었다. 손을 꽉 쥐어오는 것은 아마 적당히 하라는 신호일 것이고, 그의 의사에 따라 그만 웃어보려고 시도는 했지만…역시 잘 되지 않았다. 반대쪽 손으로 입을 막는 타카오를 바라보는 아오미네도 같은 말을 했다. 너 진짜 그대로다.
아오미네 다이키가 직접 만든 식사를 기대하지는 않았고, 애초에 상상도 잘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게 될 줄은 몰랐다. 가볍게 투덜거려봤지만 집주인은 맛있어. 한 마디로 일축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영어로 만들어진 중화요리점 팜플렛에서 메뉴를 하나 골랐다. 타카오의 짐을 빈 방에 옮긴 아오미네가 전화를 걸어 주문했다. 주리를 틀지 않는 이상은 유창한 영어라는 평을 들을 일이 평생 없을 수준이지만 본인은 뜻이 통하니까 됐다 정도로 생각하는 듯 했다. 하나 인상적인 점은,
“땡큐 소리를 자주 하네?” “응, 고맙다 고맙다 해서 밉보일 일 없으니까 열심히 해두라고 그러더라 카가미가.” “귀국자녀의 조언이면 따를 만하네.” “뭐 그렇지. 밥은 한 30분쯤이면 올 테니까 잠깐 쉬고 있어.” “다이쨩은?” “나는…너 쉬는 거 구경하고.”
나름 진지하게 하는 대답이어서 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소파 팔걸이에 기댄 채 부들부들 떠는 타카오를 좀 불퉁한 얼굴로 바라보던 남자가 바짝 붙어앉았다. 웃으면서도 몸을 반대로 돌려 그에게 상체를 기대자 당연하다는 듯이 팔이 허리를 감아온다. 몸을 바짝 붙이자 손을 잡고 싶어졌고, 깍지를 끼어 꼭 손을 붙잡자 입술이 근질근질했다. 이렇게 피부를 대는 것도 오랜만이다. 입맞춤에 아오미네가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예쁘게 웃게 됐더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도 아무튼 타카오 때문이었다. 그거면 충분하다. 깍지는 낀 채로. 다른 쪽의 팔로 서로를 끌어안는다. 가만히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닿자 자연스레 열렸다. 혀가 닿으면, 맛이 났다. 감각이 하나 추가 되면서 접촉은 보다 농후한 것으로 바뀌고 어느 순간 몰두하게 된다. 살살 옆구리를 어루만지던 손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응?” “안 피곤해?” “음…. 괜찮은 거 같은데.” “그래?” “…근데 더 하다가 중간에 배달 와서 멈추고 나가면 그것도 좀 이상하니까.” “그렇지?”
중간에 그만두려니 좀 아쉽다마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대신에 타카오는 양팔로 아오미네의 목에 매달렸다. 슬쩍 체중을 싣는 대로 쉽게 누워준 그는 연인이 혹시라도 떨어지지 말라고 허리 뒤에서 깍지를 끼었다. 늘 저 위에 있는 이마가 아래로 내려온 김에 뽀뽀도 한 번 하고, 귓불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목 뒤를 매만지고. 만족할 때까지 실컷 만지고 나니 비로소 몸이 나른해졌다. 연인의 몸 위에 납작 엎드려 한숨을 쉬었다.
“좋다.” “응.” “역시 오기 잘했어.” “잘됐네.”
고생은 좀 했지만. 타카오는 느리게 웅얼거렸다. 아오미네가 들었는지는 잘 몰랐다.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깐만 자는 건 괜찮겠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눈을 감는다.
얼굴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눈을 뜬다. 뺨을 주물거리던 손이 바로 멈췄다. 깼어? 배달왔어. 완전히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로도 타카오는 몸을 비켰다. 아직 비키는 중인데 타카오가 만든 작은 틈으로 아오미네가 싹 빠져나왔다. 잠시 그대로 더 누워서 귀 기울였다. 아까 택시에서 내려 들어왔던 현관은 저쪽, 작게 들리는 말소리. 비닐이 버석거렸다. 돌아온 아오미네가 테이블에 봉지를 내려놓았다.
“카즈 졸려? 더 잘래?” “아니…. 밥 먹어야지.” “차릴 테니까 조금만 더 누워있어.” “많이 더 누워있으면 앙~ 해줄 거야?” “…하고 싶어?” “…으음, 지금은 말고….”
그 후로도 비슷한 일들의 반복이었다. 타카오는 오직 그를 만나려는 목적으로 미국에 온 사람처럼 관광다운 관광은 일체 하지 않고 그저 아오미네와 찰싹 달라붙어서 시간을 보냈다. 집 주변의 공원을 산책하고 핫도그를 먹으면서 돌아오는 길에 있는 길거리 코트에서 한 판 땡기고, 저녁에는 금발 미녀와 카가미 타이가와 철심이 참가한 바베큐 파티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일어나 마트에 장을 보러갔다가, 포장된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싸들고 도심 피크닉. 오고가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려서 뭐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여름해가 뉘엿뉘엿 지는 중이었다. 휘유, 차 없으면 안 되겠네. 혀를 내두르며 하는 말에 아오미네가 어째서인지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콘돔 있어? 묻는 말에도 그 비슷한 표정이었다. 아니 없는데, 근데 찾아보면 어디 있을 것도 같은 게…. 허둥대며 시간을 벌어보려 하는 게 아무래도 그게 없으면 끝까지 가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아 그저 웃음만 나왔다. 응, 오늘만 그냥 하자. 쇄골에 살짝 손톱을 세우며 속삭이자 아오미네는 조금 웃었는데, 안도에 약간 부끄러운 빛이 섞여 거의 처음 보다시피 하는 얼굴이었다. 다음날 아침은 늦잠을 푹 잤다. 자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뺨에 입 맞추려고 가까이 가자마자 손이 턱 올라와 막아버렸다. 뭐야, 깨있었어? 불만인 척 투덜거리자 달래듯이 손등에 입을 맞춰주었다. 어제 마트에서 산 피자를 데워서 아침을 대충 때운 뒤 타카오는 통화가 끝나길 얌전히 기다렸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불렀다.
“아 알았다고, 나중에 다시 전화해. 끊는다. 카즈, 가는 비행기표 예약했어?” “몇 달 전에 했지!” “그럼, 그거 왕복표 카즈 돈으로 산 거지…?” 말꼬리가 급하게 기어들어갔다. 타카오는 반사적으로 시치미를 떼려다가, 고민에 빠졌다. “…별 거 아냐.” “별 거 아니긴. 내가 생각해도 별 거고 카가미는 방금 나한테 디립다 욕했어 나쁜 새끼라고. 그렇게 비싼 줄 하나도 몰랐네. 미안. 말을 하지….” “…….”
그야, 말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까지는 생각을 했지만. 다 해결하고 끝난 일이라고 생각한 문제가 연인과의 즐거운 나날에 진흙발로 짓쳐들어오니 기분이…나빴다. 타카오는 표 값을 주겠다는 아오미네의 제의를 건성으로 거절했다. 선뜻 그래! 하고 계좌 번호를 알려주는 게 당연한 액수인데 그러지 못하고 아득바득 이상한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스스로가 정말로 맘에 안 들었다. 거절 한 번마다 죄책감이 제곱이 된 아오미네는 결국 정 그러면 현금으로 주겠다는 큰일 날 해결책을 생각해냈고, 부담감에 진 타카오는 결국 계좌번호를 적어주었다. 못 이기는 척, 웃기는군 그래. 종이에 적어준 번호를 핸드폰으로도 찍어 남긴 아오미네는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안하면, 많이 안아주던가.” “이리와.” “뽀뽀도!” “응.”
곧장 팔을 벌려 보이는 품에 푹 파묻혀 추가로 주문한다. 슬쩍 눈을 내리감은 아오미네가 콧등과 뺨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뜨끈뜨끈하니, 이대로 녹아내리고 싶었다.
“비행기표 제대로 있고? 짐 다 챙겼어?” “다이쨩이 내 보호자 노릇하려면 십년은 멀었거든?” “그래? 그럼 잠깐만 앉아봐.”
뭐 준비한 게 있는 건 안 봐도 눈치로 알았다. 그렇지만 반지 케이스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어? 하고, 완전히 허를 찔린 한심한 목소리를 내고만 타카오의 손을 끌어당긴 아오미네는 약지에 동그란 금색 고리를 쏙 밀어넣었다. 연습이라도 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물 흐르듯이 반지를 끼워준 그가 씩 웃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쥔 채였다.
“커플링을 이제야 맞추네.” “…그러게. 와, 사이즈 딱 맞는다. 어떻게 한 거야?” “사실 좀 찍었어.”
태연한 대답에 타카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만만한 구석이 아오미네 다이키답다. 그가 내미는 케이스를 받아들자 안에는 반지가 하나 더 있었다. 무슨 용도인지 어디가 자리인지는 누가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기쁜 마음으로 자기 것보다 조금 큰 반지를 꺼내든 순간 아오미네가 재밌는 장난이라도 모의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있잖아, 카즈. 졸업하면 나랑 같이 살자.” “…졸업하면?” “지금 오면 더 좋고.” “…여기서?” “응. 졸업할 때쯤 되면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라고 정정하는 대신 타카오는 쥐고있던 아오미네의 반지를 검지에 꿰었다. 헐렁하게 남아 미는 대로 돌아가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그에게 닿던 시선이 의아하게 변할 때쯤, 커다란 한숨이 나왔다.
“카즈?” “잘…모르겠어, 다이쨩.” “…뭐가?”
분위기가 심상찮다고 느꼈는지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무슨 영문인지 감도 못 잡고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반, 그걸 전혀 감을 못 잡는 건 다이쨩 쪽도 문제가 있지, 라고 억울한 마음이 나머지 반을 차지했다. 아오미네가 이 땅에서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이 잘 지내고 있는 건 정말 기쁘고 좋은 일이었다. 보고 있으면 덩달아 이쪽도 기운이 난다.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구나, 안도 속에 날카롭게 불만이 도사렸다. 내 속은 알지도 못하고. 언제 알게 티라도 냈나? 아오미네에게 이런 방면의 통찰력을 기대해봤자 이쪽이 손해라는 건, 아마 처음 교제를 시작할 때쯤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맞는지 타카오는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잘 사는 게 다행스러운데 밉다고, 나는 너만큼 살지 못하고 있는 게 부끄럽고 질투난다고—그러니 헤어지자고, 말을 할까? 아니면 말이 헛나왔다고 얼버무리고는 앞으로도 스포트라이트 속의 아오미네의 옆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 혼자 썩어가면 되는 건가? 둘 다 싫다. 타카오는 어느 쪽도 고르지 못했다. 에이스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가 거머쥔 기적 앞에서도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자기 손으로 끼운 반지가 천천히 손가락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아오미네가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직…아직이라고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지금은 못 받아….” “카즈.”
부드럽고, 안심시키려는 목소리로 아오미네가 불렀다. 그에게 위로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저 미숙한 남자를 달래려한 적은 많아도 달래주길 바란 적은 없었다. 타카오에게 아오미네는 농구 빼면 뭐든지 저보다 서투른, 그러니 자기 쪽에서 챙겨줘야 하는 대상이었다. 아, 그 허세가 부서져서, 이런 기분인 거구나. 늦게도 온 깨달음은 그러나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타카오는 이 반지를 받을 수 없었다. 다만 조금 솔직해질 수는 있었다.
“…어디부터 말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다이쨩….” “천천히, 다 말해.”
앞에 무릎 꿇은 채인 남자의 조용한 말이었다. 눈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 숙인 채 타카오는 중얼거렸다.
“모르겠어. 이걸 진짜 말해야 되는 건가…말하면 되는 건가. 다이쨩은 이제 프로잖아, 나는 그냥 대학생이고. 그게…되게…힘들거든. 뭐가 힘드냐면 그러니까….”
너한테 열등감 느끼는 게 너무 싫어.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오미네는 그래…. 하고 중얼거렸다. 타카오의 무릎 한 쪽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재촉 당한 듯이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안 그러려고 노력했는데 마음이 내 맘대로 안 돼.” “그치…잘 안 되지.” “그런 생각하는 내가 엄청 한심하고 못난 거 같고…그러니까 힘들어.” “그랬구나.” “어떡해야 될지 모르겠어. …나 사실, 오기 전에 다이쨩 얼굴 보면 헤어지자 소리 나올지도 모르겠다 생각까지 했어. 무슨 연애가 이래, 난 안 이러고 싶어. 근데 다이쨩이랑 계속 같이 있으면 계속 이럴 거 같아.” “여기 와서도 계속 힘들었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그만할까 생각도 했는데.” “그만할까?”
아오미네의 목소리가 있으니 겨우 상상이 갔다. 그만할까? 그만하고 적당히 평범하고 귀여운 여자애랑 보통 연애를 할까? 더 망가지기 전에, 추억이 될 수 있을 때에 그만두는 게 좋겠어?
“…그건 싫어. 다이쨩 좋아하니까, 다른 사람 주는 건 싫어.” “내가 아무한테도 안 가고 그냥 있어도?” “그래도 내꺼 아닌 거잖아 싫어….”
타카오는 그럼 어떡해, 하는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하는 대신 아오미네는 조금 웃고서 그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어떡하냐, 우리….” “다이쨩,” “그래도 내일 비행기는 타야 되고.” “…그러게.” “그럼 반지는 그냥 내가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카즈가 갖고 있으면 그것도 힘들어? 이렇게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고개를 살짝 젓고 내민 손에서 자기 손에 끼워주길 바랬을 반지를 수거한 아오미네가 다시 반지 두 개가 들어있게 된 케이스를 쥐어주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하단 말에 다시 고개를 젓는다.
“몰랐잖아.” “몰랐어서 미안해.” “괜찮” “안 괜찮다고 여태까지 울어놓고 뭔 소리야?” “울진 않았는데….” “다른 게 다 좋아도 네가 안 괜찮으면 그건 나쁜 거야. …기다릴게.” “기다린다고?” “응, 카즈가 정할 때까지.” “나한테 다 떠맡기는 거네?” “그러게. 그래도, 카즈가 안 괜찮은 결정이면 반대할 거니까.” “여태까지 전혀 몰랐으면서?” “이제 알잖아.”
왜 이렇게 아오미네에게는 자기 혼자 당연하게 많은 걸까 타카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게 엄청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유는 더 모르겠다. 그렇다. 아오미네는 이제 타카오가 힘들었다는 걸, 괜찮지 않다는 걸 안다. 괜찮지 않은 타카오가 어떤지 지금 보았다. 이제 알아버렸으니 앞으로는 타카오가 아무리 태연한 척 숨겨도 알아차릴 것이다. 울보떼쟁이의 억지와 비슷한 수준의 논리전개인 동시에 대단히 믿음직한 확언이었다.
“카즈가 괜찮을 때 연락 줘.” “무슨 연락?” “뭐든지. 헤어지자던가, 이제 그만하자는 얘기도…네가 괜찮으면. 그러면 뭐든지 괜찮아.”
그게 괜찮다고? 간신히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아오미네에게는 들린 모양이다. 그는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이게 답인 거 같지만 확신이 아직 없다는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네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을 거야. 어울리지도 않는, 정말 너무너무 어울리지도 않아서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그런 말이었다. 그가 지금은 이게 정답이라 짐작하는 것을 읽어버린 타카오도 어쩔 수 없이 조금 웃은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